1. 새로운 시대를 선포하심
마태와 누가는 제국의 질서를 뒤집고 낡은 종교로 전락한 이스라엘을 대체할 새로운 왕의 출현을 알린다. 누가는 다가온 새로움을 경축하는데 강조점을 두었고, 마태는 애통의 장면을 넣었다.
새로움은 고뇌와 고통과 눈물 없이는 오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가 왔다는 것은 기존의 나라들은 끝이 나고 새로운 통치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예수의 예언자적 목회는 근원적 해체를 낳는 비판이다. 하나님 나라 복음은 무언가를 끝장내지 않고는 시작하지 않는다. 큰 대가를 요구하지 않고는 선물을 주려고 하지 않는다.
예수의 근원적 비판은 용서, 안식일, 식탁 교제, 치유와 귀신축출, 여성, 세금과 채무(빚), 성전을 접근함에 있어서 전혀 새로운 행동으로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방식을 천명했다.
2. 애통과 긍휼의 정치
예수는 주변부로 밀려난 인생들과 함께 하셨고 그들을 긍휼하게 여기셨다. 아픔은 진지하게 다루어야 할 사안이었다. 이에 긍휼은 아픔(비통)을 비정상적인 발생으로 보며 울음과 이의제기로 공적 표현을 하게 된다.
그러나 예수의 긍휼은 개인 감정을 달래는 것이 아닌, 사회의 총체적 무감각에 대한 공적인 비판과 사회적 관심이었다.
예수는 소외된 이들이 당하는 아픔을 자신의 일로 품으셨다. 아픔의 내재화를 자신의 가르침과 실천으로 보여주셨다. 몸소 겪은 고난은 희망을 낳고, 공적으로 표현된 애통은 새로움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예수의 긍휼의 목회(정치)는 능력과 경쟁으로 달려가는 사회를 막으면서 시장과 법정에서 번지는 신음과 탄식소리가 새로움의 시작이 된다고 믿게 했다.
3. 죽음을 끌어안고 죽음 속으로
새로움을 원치 않는 옛 질서(세상)는 애통을 의도적으로 부정함으로써 새로움이 깃드는 것을 막는다. 애통을 차단하면 현 질서는 죽은 상태로나마 이어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예수의 뜨거운 울음은 예루살렘을 위해 눈물 흘리는 장면에서 그 고조를 이룬다(눅 19:41-42). 예수는 '무감각의 온상'이 된 예루살렘의 죽음을 슬퍼했다. 언약의 전진기지요 보금자리였던 예루살렘은 이제 끝났고 조기(弔旗)가 달린다.
예수의 죽음은 왕권(지배) 의식에 대한 결정적 비판이다. 십자가 처형은 고매한 인격을 가진 한 사람의 희생에 불과한 사건이 아니다. 그렇다고 오직 천당 가게 해주려고 속죄의 제물이 된 것으로만 단순화시켜도 안 된다.
예수의 죽음은 자신의 백성이 당해야 할 죽음을 끌어안으신 것이며 무감각을 깨뜨리시는 격정(파토스)이자 긍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