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자 우선 구원>
베데스다 연못은 경쟁에서 이겨야 구원을 거머쥐는 가혹한 사회다. 물이 솟을 때 치유력이 강한 화학요소 때문인지, 어떤 병에 걸렸든지 무찔러 가서 선착순에 들면 치유되는 것이 이 연못의 구원관이다.
병자들끼리 치열한 경쟁자가 되어 불리한 자들은 낙오되고 기회를 상실하는 능력중시의 사회다.
<바꾸고자 하는 의지>
예수의 시선은 몰골이 흉한 비참한 자에게 머물렀다. 기회의 공정마저 상실한 38년된 병자에게 ‘너가 낫고자 하느냐?’로 새로운 질문을 하신다.
예수는 이 사람의 낫고자 하는 의지의 중요성을 자극할 뿐 아니라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8절)는 도발적이고 예기치 않은 초대를 하신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시길래 이런 말을 하실 수 있습니까?"
<안식일>
죽은 종교는 안식일을 주신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고 그 의미를 잃은채, 안식일 자체를 경배했다. 안식일의 참된 의미에 대해 질문하지 않았다.
안식일은 하나님이 승리하신 날이다. 하나님은 혼돈의 세력과 싸우기 위해 '긴장'하시고 혼돈과 무질서를 제압하신 후 '안식'하신다. 그렇기에 안식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날이 아니라 아버지의 일을 하는 날이다.
<특별한 자의식>
이스라엘 역사에서 자신을 하나님의 '친아들'이라고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예수는 매우 온전한 정신으로 유례가 없는 주장을 했다.
예수의 친자(親子) 주장은 힘센 자의 특권적 대우 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 목숨을 바쳐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겠다는 선언이다. 무한책임의 지극한 순종을 하겠다는 엄숙한 의지다.
<나를 보내신 이>
요한복은에는 ‘보냄 받은 자’라는 표현과 함께 신적 파송자의 파송 행위가 40회 이상 나온다. 구약의 맥락 안에서 예언자 파송과 그 궤를 같이 한다.
하나님은 보냄(파송)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지탱하셨고 이제는 인류(세상)를 지탱하고 구원하려는 뜻을 두셨다.
예수님은 이런 신적 비전을 받아 자신을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는 '독특한 철저함'으로 세상 구원을 시작했다.
<영생>
구약에서 이어져 온 영생개념은 우리의 사회, 정치, 문화의 방향을 결정하는 데 도움을 준다.
요한복음에서 영생은 죽음 이후에 시작되는 것이나 죽어서 누릴 것이 아니다. 영생은 이 땅에서부터 시작되는 삶이며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에 결속되어 사는 삶이다.
영생은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을 결박시키고 타자(남)와 촘촘하게 연결되어 연합과 동거를 누리는 삶이다. 다른 이들과 끈끈한 유대감을 갖고 사는 삶이 영생이다. 타자 없는 삶은 영생 없는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