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해야 할 사람이 있고 쇠하여야 할 사람이 있다. 무명의 소년목동 시절을 거쳐 이스라엘의 목자로 정점을 찍는 다윗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제는 다윗의 등장과 그의 시간이다.
하나님의 다윗을 향한 숨겨진 뜻과 목적이 역사의 거친 파도와 엮이면서 궁극적 성취로 이어진다.
하나님은 '새로운 가능성'으로 다윗을 특정하시고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바울은 사무엘상을 읽고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의 신실성'을 예찬하지 않았을까?
<하나님과 사무엘의 준비>(1-5)
다윗의 출현은 혈육이나 어떤 인간적 요소보다는 하나님의 주권적 의도가 더 강하다. 사무엘은 기존의 왕이 있는 상태에서 새로운 왕에게 기름을 붓는 위험천만한 일을 감행한다.
그런데 기름부음의 예식을 희생제사로 포장하고 둔갑한, 노골적인 거짓말 혹은 허락받은 속임수 같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하나님의 편애하는 듯한 배타적 사랑을 본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이토록 마음에 들었단 말인가?
주변부의 작은 자 사이에도 '아름다운 사람'이 필존(必存)하며 위대함의 가능성이 있다.
<완전수 밖에서>(6-11)
새로운 왕의 조건은 결코 외적인 용모에 의해 좌지우지되면 안 된다. 사울의 외모 때문에 선택한 것이 가져온 결과를 다시 겪을 순 없다(삼상 10:23).
이제는 하나님의 마음에 맞을 정도로 확실한 왕이 필요했다. 이새의 일곱 아들이 거절되었고(선택되지 않은) 적막이 잠시 흐른 뒤에 예외자 내지 깍두기 같았던 8번째 아들을 기다려야했다.
사람이 공적으로 세워진다는 것은 '신비와 여백'이 더 많다. 때로는 천심(天心)이 민심(民心)을 덮어쓴다.
<기름부음>(12-13)
사무엘은 외모에 신경 쓰지 말라는 언질을 받았지만, 막둥이를 본 순간 가슴이 뛰었다. 눈이 부실 정도의 미남이었다(12절).
기름부음은 은밀하게 비공식적으로 거행되었다. 그러나 기름부음은 하나님의 원함(비전)을 구현할 인물이 되게 할 것이고, 이스라엘에게도 새로움이 될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영에 의해 ‘뒤집혀 질 수 없는’ 사명에 붙들렸다. 매사에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인생으로 전진할 것이다.
<실효적인 섬김>(14-23)
정서적 장애가 있는 사울에게 청년 음악가로서 다윗은 치유의 효과를 가져왔다. 앞으로 다윗은 나라의 모든 고통을 치유할 수 있는 해독제 역할을 할 것이다.
그런데 답정너 같으면서도 신비에 쌓인 듯한 질문 하나가 남는다. 한적한 유대 골짜기에 살고 있었던 다윗을 어떻게 이처럼 국가의 적임자로 잘 알고 데리고 올 수 있었을까?
‘비밀스러운 기름부음’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도자는 ‘생명의 수여자’이어야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