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뜻(神意)이 이끄는 삶(4:34)
‘밤에나 낮에나 주님 생각, 잘 때나 깰 때 함께 하소서’(찬송가 484장)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에 살고 지려 했던 8세기 아일랜드 교회의 기도문이자 찬송 가사다.
그런데 하나님 뜻을 추구했던 원조는 구약에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 같은 하나님의 사람들이고, 그 꽃봉우리는 나사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다.
교회의 역사에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는 것 같이 하여 살아낸 복되고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이 줄기차게 흐른다.
우리 인생은 언제나 이 둘 사이에서 오락 가락 하며 산다. 사익(私益) 추구의 소인배적인 삶이냐, 아니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우리는 이 두 개의 갈림길에서 항상 분별하고 선택해야 한다.
‘마육삼삼’(마 6:33)의 말씀 원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도전과 격려를 주는 리트머스 시험지 혹은 거울과 같다.
자기 욕심과 소비주의에 물들어 살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들의 얼굴에 새겨진 신적 음영(그림자)을 읽으면서 돕고 살 것인지 각자의 양심에 묻고 몸으로 결단하자!
2. 내게 하라고 주신 일(17:4a)
선교의 역사는 한마디로 '주께 드려진 자들'이 이뤄낸 열매들이요, '주께 받은 자'들이 생명의 복음(승전보)을 위해 경계를 넘어서 온 맘과 온 몸으로 나눴던 시간들이다(요 17:28을 읽어 보라).
하나님께서 있으라고 하는 곳에 있을 때 우리는 승리의 기쁨을 맛본다. 예수께서는 '한 방향으로 오랜 순종으로' 굽힘 없는 실천이 주는 사랑의 창조적인 생명력을 보여주셨다.
'올바르게 꾸준하게' 살아간다는 것은 어렵지만 해 볼 만한 모험이자 성도의 책무다.
하나님께서 개인에게 주신 사명과 부여하신 과제가 있고, 교회가 보냄 받은(missional) 존재로 세상과 직면하여 때로는 긴장과 저항, 때로는 협업과 성육신적 참여를 하기도 한다.
개인이든 교회이든 섬겨야 할 현장(이웃)을 잃으면 개인과 교회는 '일상의 퇴폐성'에 빠진다(먹방과 인스타를 보라).
사명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가정에서 루틴한 역할부터(설겆이와 화장실 청소) 일터에서 유연한 성실함, 공동체의 지체들을 돌보며 친밀한 코이노니아를 누리기, 사회와 열방을 위한 교회의 기도 등이다.
3. '이 땅에서' 하나님께 영광(17:4b)
하나님의 백성들은 불과 뱀이 날아다니는 바로 이 세상에서 신적 통치의 대리인(agent)으로 산다. 그리스도인은 물정(物情)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일터에서 성령의 새로움으로 다르게 살 수 있다.
하나님의 선교적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려는 시간과 공간 그 자체가 신적 빛남(光輝)으로 덧입는다.
성도의 영광은 예배당 안에서만 목소리 높지 않고 일터에서 정의와 자비의 열매를 맺는다.
우리가 사는 이 땅, 코리아는 많은 고통과 슬픔이 서린 곳이다. 그와 함께 이젠 십자가의 영광도 누리고 있는 중이다.
불순종으로 인해 삼대의 저주가 있지만 순종(올바른 방향으로 꾸준한 실천)을 하면 자손의 자손으로 축복이 깊고 멀리 흐르게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 생각을 바꾸고 뼛속까지 자리잡은 '세계관의 회심'이 절실하다. 사촌이 땅을 사면 축하해 주러 가고, 공부해서 남 주는 인식의 변화를 구하자.
성령의 새로움 안에서 다른 이야기를 써내려 가는 한 해가 되어야겠다.
<성찰과 실천을 위한 질문>
일상과 일터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찾기 위해 성경을 읽고 묵상하자. 그런 후에 깨달은 말씀으로 기도하는 훈련을 서로 격려하면서 실행한 후 함께 나누는 시간을 갖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