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망가지고 관계가 틀어지고 경제적인 겨울이 닥칠 때 우리는 성찰하거나 다시 근원으로 돌아가려는 채비(arrangement)를 차린다. 이것은 '인과응보의 두려움'에 기인한 자기검열보다는 현재를 극복하려는 '희망의 움직임' 때문이다. 예언자적 상상력은 폐허가 된 현실에서 '창조의 새로운 숨결'(루아흐)을 감지한다. ‘내 탓이야’도 아니고 ‘너 때문이야’도 아니다. 딱히 설명할 수 없지만 무언가 다시 창조하려는 '신탁(神託)의 육중함'을 느낀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시간, 찬란한 영광으로 충만했던 공간(성전)은 파괴되었고 사라졌다. 바로 이 때 자문(自問)의 밤을 보내며 성찰의 질문을 한다. 절망의 시간과 공간 속에 선한 것이 다시 올 수 있을까? 도시 중의 도시였던 예루살렘은 번영을 되찾을 수 있을까? 의심과 실의에 빠진 사람들의 마음을 압도적으로 뒤집을 만한 메시지는 있을까? '하나님을 오시게 하는 기도'가 이루어 질 때 예기치 않는 진풍경이 펼쳐진다.
경쟁절대주의와 새롭게 출현한 학벌권력 속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의 개벽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하소서!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는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기쁨을 준다.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고 즐거워하신다는 것은 낙담하고 실의에 빠진 상태를 종결한다는 말과 같다. 창조하는 재구성의 풍경은 곡성(哭聲)을 환성(歡聲)으로 바꾼다. 생명의 날이 길어진다. 환희의 날을 누리며 희열의 공동체 안에서 성령의 코이노니아를 맛본다. 적대의 벽이 허물어지고 '만민이 기도하는' 한 새 사람(one new man)의 열린 공동체를 맛본다.
다시 시작하고 재건하려는 하나님의 뜻은 신실한 언약적 사랑(헤세드)으로 차오른다. ‘몸을 입은 말씀’은 우리의 노동에 따른 보상을 뒤집거나 꺾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의 자산을 보호하시고(23절), '나와 너의 경제'를 구성한다. 파괴적인 부, 가난하게 만드는 부를 넘어 '공생하는 공동체'를 만든다. 생태적인 정의가 작동하는 조화로운 대동사회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상은 '생태적인 조화로서 만물의 회복'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사람만이 아니라 창조된 '모든 생명'에 대하여 보시기에 좋은 상태를 만든다. 구원은 본연의 위치로 돌아가는 재배열이다(25절).
'해치거나 상하게 하는 것도 없다'는 말은(65:25) 지상낙원이나 불로장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낯섦과 차이'를 지나치게 강조하여 '배제와 불평등'을 당연시 여기려는, 모든 부당함에 대한 끝이며 멈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