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처음으로>(ad fontes)
몸이 망가지고 관계가 틀어지고 경제적인 겨울이 닥칠 때 성찰하거나 다시 근원으로 돌아가려는 채비(arrangement)를 차린다.
이것은 인과응보의 두려움에 기인한 자기 검열보다는 현재를 극복하려는 '희망의 움직임' 때문이다.
'예언자적 상상력'은 폐허가 된 현실에서 창조의 새로운 숨결(루아흐)을 감지한다.
‘내 탓이야’도 아니고 ‘너 때문이야’도 아니다. 설명할 수 없지만 뭔가 다시 창조하려는 신탁(神託)의 육중함을 느낀다.
<슬픔의 끝으로>
모든 것을 잃어버린 시간이었고, 찬란한 영광으로 충만했던 공간은 파괴되었고 사라졌다.
절망의 시간과 공간 속에 선한 것이 다시 올 수 있을까? 도시 중의 도시였던 예루살렘은 새로운 번영을 찾을 수 있을까? 의심과 실의에 빠진 사람들의 마음을 뒤집을 만한 메시지는 있을까?
'하나님을 오시게 하는 기도'가 이루어질 때 예기치 않는 진풍경이 펼쳐진다.
<희열의 공동체>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는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기쁨을 준다.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고 즐거워하신다는 말처럼 낙담하고 실의에 빠진 상태를 종결짓는 것은 없다.
곡성(哭聲)에서 환성(歡聲)으로 바뀐다. 생명의 날이 길어진다. 환희의 날을 누리며 희열의 공동체 안에서 성령의 코이노니아를 맛본다.
적대의 벽이 허물어지고(엡 2:14) 만민이 기도하는(왕상 8:41-43) 한 새 사람(one new man, 엡 2:15))의 진수를 맛본다.
<자비의 경제학>
하나님의 뜻은 다시 시작하고 재건하려는 것이다. 신실한 언약적 사랑(헤세드)으로 차오르고 ‘몸을 입은 말씀’은 우리의 노동에 따른 보상을 뒤집거나 꺾지 않는다.
우리의 자산을 보호하시고(23절), 나와 너의 경제를 구성한다. 파괴적인 부, 가난하게 만드는 부를 넘어 공생하는 공동체를 만든다.
만물까지 동등한 자유를 누리는 생태적인 정의가 작동하는 조화로운 대동사회다.
<만물까지 회복하심>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상은 생태적인 조화가 이루어진 만물의 회복이다.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은 사람만이 아니라 창조된 모든 생명에 대하여 보시기에 좋았던 본연의 위치로의 재배열이다(25절).
해치거나 상하게 하는 것도 없다는 말은 지상낙원이나 불로장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은 낯섦과 차이를 지나치게 강조하여 배제와 불평등을 당연시 여기는 모든 부당함에 대한 이의제기이자 멈춤의 명령이다.
주님, 신앙을 해명하려는 듯이 찬미의 노래를 부르고,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토록 주님의 것이라는 고백을 주문처럼 하곤 합니다.
꽤나 만족스러운 기도를 하고나면 자신감 넘치게 큰 목소리로 '아멘'을 외칩니다.
하지만 주님의 영광과 우리의 기쁨이라는 인생의 제일 목적은 우리에게 보이지 않습니다.
인생의 목적을 모르기에 삶의 의미도 잘 모릅니다. 이런 우리를 주 예수여, 불쌍히 여기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