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에 대한 몰이해가 휩쓸고 있는 현실이다. 교회마저도 저급한 자유로 퇴행하고 있다. 성경을 관통하는 자유에 대한 메시지는 무엇일까? 사랑할(하려는) 자유다. 남(이웃)을 사랑하려는 자유가 있다면 '하고 싶은대로 하려는 자유'의 부작용은 억제 될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 교리(도리)는 '모두가' 똑같이 자유롭게 만들어졌고 삶에서도 각자의 존엄한 가치가 보존되는 것을 전제로 한다. 교회와 사회는 인간의 동등한 개별적 자유가 발현되도록 진력한다.
하나님은 자유로 충만하시기 때문에 만물 속에 독특한 것들이 즐비하고, 다름으로 수놓아진 다채로운 조화를 보실 때 춤추며 기뻐하신다. 하나님은 개별성의 존중과 어울림의 섞인 상태를 모두 원하신다. 성경에서 자유의 원리란, 인간이라면 ‘모두가’(특정한 사람과 집단만이 아닌)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부여된 자유를 어떤 조건과 상황 아래서도 훼손되거나 억제 당할 수 없다는 것이다.
'모두가'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이 바로 공동선이다. 그렇다면 공동선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자유를 지키고 확장시키는 것이다. 자유는 공동체의 유익 즉, 공익(公益)을 지향한다. 사익을 추구하는 것은 탐욕이지 자유라고 부를 수 없다. 바울은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사서 먹는 것이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을 밝힌다. 그렇지만 신앙의 초보자들이 신앙을 갖기 전에 신전에서 행했던 우상숭배의 죄악을 배려하여 바울 자신은 우상의 제물을 먹지 않는다고 했다. 자유의 권리를 '다른 이들을 세우는' 쪽으로 사용한다.
자유는 '모두가' 좋은 상태를 유지하도록 행사하는 것이다. 내가 자유로운만큼 다른 이들도 자유로워야 한다. 천박하고 반쪽짜리 자유란 나만 자유로우면 된다고 생각하거나 이웃이 겪는 불평등과 불공정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 '변형되고 탈색된 자유"가 상수처럼 당연한 듯 활보하고 있다. 나의 소유만을 지키기 위한 자유(권리)를 과도하게 중요시하는 일이 생겼다. 더 소유하기 위해 불법과 부당한 절차와 전관예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얻은 소유를 절대적으로 고수하려는 것을 자유라는 이름으로 허용하고 면죄부를 주고 있다.
특권과 특혜가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지고 그에 따른 부의 편중이 발생했다. 소득의 불평등과 청년세대의 주거 불안은 '모두가' 자유를 향유하고 있지 않음을 반증한다. 기회의 균등 속에 숨겨진 것은 공평한 기회의 절차만 갖췄으면 문제 될 것이 없다고 하는, 소유적 자유주의자들의 방어 논리가 숨어있다. 그러나 치명적인 문제는 개천에서도 용 날 수 있는 ‘능력’(capability)이 제대로 평가되고 인정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자기 중심적인 욕망'을 극대화하려는 지식(이념)은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의 삶을 훼손하고 파괴한다. 소유하려는 욕망에 물든 자유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유가 아니다. 10%만 저녁이 있는 삶을 누리고 나머지는 벽돌 굽는 노예처럼 살도록 방치한다면 자유는 유린당한 것이다. 불평등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자가 악인이다. 자유는 '모두가' 기뻐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천성(天聲) 즉, 하나님의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