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행합일(知行合一) (요 3:17-21)
구태(舊態)에 도전하고 낡은 관습을 뒤흔드는 진리에 대한 질문이 있을 때 근본적인 변혁이 발생한다. 초대교회 사도들이 군사주의적이고 정치적인 메시야관을 거부하고 십자가가 달린 그리스도가 세상의 구원이 된다고 했을 때 오래된 가치체계가 흔들렸다. 루터가 미사라는 제사의 중재 없이는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주장에 이의를 제기했을 때 세상을 지배하던 기존 관념을 털어버릴 수 있었다.
요한복음은 헬라 세계를 향해 하나님 나라 복음을 나누려고 한다. 헬라 문화와 사유 체계 속에서 형성된 '진리'에 관하여 새로운 질문과 뒤집기를 시작한다. 헬라 세계에서 진리라는 말은 ‘숨은 것을 드러내다’는 뜻이다. 진리는 숨어 있기 때문에 발견해야 한다는 것이다. 진리는 표면을 뚫고 깊은 곳에 있기 때문에 움직이는 땅과 표면을 넘어 깊고 영원하며 변하지 않는 곳에 있다는 의미다.
유대-기독교적인 세계관에서 진리란 ‘진리를 행함’ 혹은 진리는 '발생하는 것'(happen)이다. 히브리적 문법에서 진리는 하나님에 의해 '시행된'(done) 구체적인 그 무엇이다. 진리는 숨겨져 있다는 의미가 이제 진리는 계속해서 '발생하는' 사건이 되었다. 진리는 삶의 문제이며, 관계이자 결단이다. 진리는 발견되어질 뿐만 아니라(헬라적), 행해지면 발견되고, 발견되면 행해진다. 진리는 사물들의 영원하고 움직일 수 없는 본질의 드러남이라기보다는(헬라적) 역사 안에서 실현하려는 새로운 창조다(히브리적). 진리의 반대말은 하나의 의견이 아니라 거짓말이다. 진리는 지적 유희나 관념의 나열이 아니라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비장한 결단이다.
진리는 예수님을 수용하거나 거부하는 결단이다. 주님을 만나서 알았다면 그분에 대한 하나의 견해를 가졌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예수를 따름으로 진리를 행하거나, 주님을 부인함으로 거짓을 행할 수 있을 뿐이다. 진리를 향한 결단은 주님을 향한 결단과 같은 말이다. 진리와 주님이 결코 분리될 수 없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진리에 속한 자들이고 진리를 행할 수 있는 자들이다. 기독교는 이론과 실제, 아는 것과 행하는 것 사이의 틈을 결코 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진리야말로 ‘구원을 이루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구원을 이루는 진리라고 말할 때 '수행된 진리'를 의미한다. 이 진리는 ‘진리를 행하는 자’ 안에 있다. 진리는 머리 속이나 관념의 허공에 있지 않고 삶과 역사 속에서 사건을 만든다. 진리는 실천하려는 사람의 됨됨이로 열매를 맺는다. 진리는 설명하거나 나열하는 것을 넘어 행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해석과 지적 유희를 극복하고 살아내기 위한 것이며 세상을 바꾸려는 아름다운 몸부림이다.
지행합일은 현상유지에 안주하려는 게으른 타성을 미워하는 마음이다. 옴몸으로 시간 속에 진리를 담아내려는 순종이다. 개인적으로 진리를 행하는 것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우는 자들과 함께 울며, 기뻐하는 자들과 함께 기뻐하는 연말연시를 보내자. 교회 차원에서 진리를 행하려고 하면 어떤 것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