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4-6장은 패배당한 하나님이 영광 가운데 귀환하는 이야기다.
하나님은 관행을 거스르는 분이다.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을 거슬러 올라가 새로운 행동을 하는 힘을 갖고 있다.
이스라엘을 새롭게 하는 '하나님의 새로움'은 경탄을 자아낸다. 하나님은 우리의 얄팍한 한계와 흔들리는 기대 너머로 생명과 안녕(샬롬), 씻음과 정의를 주신다.
<하나님의 부재>
이스라엘은 법궤가 있었지만 전쟁에서 참패한 것은 법궤 없이 패배한 것보다 더 황당한 일이다.
비느하스의 아내가 죽어가면서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고(4:21) 말한 것은 이스라엘의 현재 상태를 제대로 본 것이다. 하나님이 사라지셨다.
법궤는 이스라엘에게는 신적 권력의 구현이자 상징이었다. 그러나 법궤 옆에서 엘리의 아들들은 죽었다. 이스라엘의 패배는 하나님의 부재 때문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뜻인가?
<포로가 된 법궤>
출애굽을 성취했던 야웨셨지만 지금은 패배당하고 창피당하는 연약한 하나님이 되셨다.
옛 영광의 날에 바로를 누르고 승리자와 해방자였던 하나님께서 정반대로 '뒤집힌 출애굽'이 되셨다.
법궤는 블레셋의 아스돗에 있는 다곤신(神)의 신전에 옮겨졌다. 그 이유는 블레셋이 야웨를 이겼다는 전승(戰勝)에 대한 기념이자 야웨의 남은 힘을 받기 위한 의도였다.
<다른 손>
블레셋은 다곤과 같이 조각으로 만든 신은 진짜로 힘이 없고 하나님과 견줄 수 없다는 것을 몰랐다.
다곤은 법궤 앞에 얼굴을 숙이고 있었고(5:3) 다음 날 아침에는 흉측하게 머리와 손을 잃고 법궤 앞에 엎어져 땅바닥에 얼굴을 박고 있었다(5:4). 다곤은 생각할 머리가 없고 행동할 손이 없다는 것이 아닐까?
‘그 다음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보니’(5:3-4)의 표현은 복음서에서 부활절 느낌을 준다. 하나님의 주권은 살아 있다!
<스스로 행하는 자>
하나님은 ‘자력 발진자’이시므로 법궤와 제물을 실은 마차는 혼자 가야했다(6:9).
‘하나님의 손’(힘과 권세)은 ‘영광의 무게’로 블레셋의 3대 도시를 다스리신다(5:6-12).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을 붙잡아 놓을 수 없다.
다곤에게 연승한 하나님을 고향으로 보내려면 값을 지불하고 떠나 보내야 한다. 하나님은 승리 가운데 고향으로 돌아온다.
<하나님의 새로움>
우리의 인생과 사회는 칠흑 같은 어려움 속에 놓여져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놀라운 생명력은 우리 주변을 흐른다.
'부활의 새로움'은 벧세메스 들판의 기쁨과 같다(6:13). 교회는 새로움을 얻기 위해 위험을 감수한다.
이스라엘은 상실한 영광에서 되찾은
영광으로 전환한다. 통곡에서 기쁨으로, 부끄러움에서 영광을 얻는 것으로 바뀐다.
얽매임에서 자유, 어찌할 수 없는 연약함에서 부활의 권능으로 새로운 시작이 열린다.
부활 신앙은 '성령의 새로움' 안에서 변화를 지향하는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