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은 예상치 못한 '새로운 상상력'을 만든다. 고통은 '비약적인 생각'을 낳는다. 이사야는 고통과 고난의 원인에 대한 성찰을 통해 한 사람(공동체)을 불러낸다. 소위 ‘고난 받는 종의 노래’(시)가 흐른다. 특정된 하나님의 종은(52:13) 이스라엘 공동체가 겪고 있는 고난과 고통의 총합을 고스란히 받아서 담고 사는 것 같다. 고난의 무게는 고난의 신비로 상승한다.
현재 이스라엘이 겪고 있는 비통과 절망이 고난 받는 종에게 투영된다(53:1-3). 사자에게 뜯어 먹힌 사슴처럼, 전쟁으로 초토화된 폐허의 마을을 보듯, 이스라엘의 망가진 현실이 고스란히 고난 받는 종에게 이월된 느낌이다. 비참과 슬픔의 시간이 계속될 뿐 호전(好轉)의 기미는 전혀 없다. 절망의 시간은 멈출 것 같지 않은데, 과연 이 무게를 짊어질 수 있는 사람은 있을까?
우리가 징벌적 응징을 받아야 하는 것으로 고난을 이해할 때, 다른 이들의 고난에 대해서도 같은 생각을 갖는다(4-6). 그렇지만 이사야는 ‘고난 받는 종’의 '대신 짊어짐'과 '대표해서 넘겨지는' 모습을 포착한다. '짊어지고 넘겨진 시간'은 혼돈과 무질서로 이어진 상흔(傷痕)을 '새로운 질적 시간'으로 전환한다.
형벌을 받아야 할 사람들 때문에 아무런 잘못도 없는 사람이 부당하고 불명예스러운 죽음을 당해야 하는 일이 발생했다(53:7-9). 어떤 사람의 잘못을 대신하여 누군가 희생하면 그 사람의 처지를 새롭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은 대부분의 제의종교 안에 있다. 기독교는 새로운 질문(하나님이 희생의 제물이 될 수 있는가?)을 통해 '응보(應報)의 종교'를 끝내고 은혜와 진리(헤세드와 에메트)로 살아가는 새 사람의 길을 열었다.
죽음을 끝내기 위해서는 죽음이라는 최후의 카드를 꺼내야 한다. '죽음으로써 죽음을 종식하는 방식'이다. 처절하게 약함의 방식으로 '비무력(非武力)의 무력(無力)한 상태'에 던져져서 집착에 물든 개인과 사회를 정화하는 것이다. 예수의 죽음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죽음이다. 인간에게 희생의 제물을 요구하지 않고 하나님 자신이 제물이 되어 혼돈과 무질서의 세상을 사랑으로 덮은 것이다.
바울은 자신을 십자가의 선교사로서 '죽음에 넘겨지는 존재'로 깨달았다. 해원(解寃)하는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영단번에(once for all) 이루어졌다. 희생은 고난과 고통의 상황에서 강요된 것이든 주체적으로 뛰어든 것인지 불문하고, 죄로 인한 질고(疾苦)와 격통으로 살아가는 인생들의 짐을 덜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