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과 거짓된 자율성>
나훔은 제국을 다루면서 어떤 ‘위로’를 주려고 하는가?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고 조롱한 이방 세력 앗시리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노래한다.
'숨어 계신 하나님'은 안하무인처럼 힘을 과용(過用)하는 것을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느끼며 이례적으로 군사력을 행사한다.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은 이스라엘을 학대하는 것이다.
<잔혹한 난폭성>
앗시리아는 100년 이상이나 중근동을 지배했고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시달려야 했다.
이 제국은 지나치게 잔인하고 난폭했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비인격적인 정책으로 피지배 민족들의 원성을 샀다.
권력을 오로지 자신의 세력 확장만을 위해 사용했으니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 하나님의 대적이 되었다(사 10:7-19).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위임 받은 것이므로 공동체의 선을 증진하고 악을 억제하도록 보호, 감독해야 한다(롬 13:3-4).
<하나님의 격분과 보복>
힘의 악용하면 어떻게 될까? 하나님을 소환하게 된다. 하나님의 주권에 저항하는 자는 종말의 끝판을 보게 될 것이다(나 1:2-8).
왜냐하면 하나님이 통치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복수는 독단적인 폭력이 아니라 반역하는 대상에 대한 '하나님 주권의 수행'이다.
하나님의 복수는 사적 보복이 아니라 공적 권력에 의한 전쟁 같은 상황의 발생이다.
<해방의 기쁨>
이스라엘은 권력의 오용으로 인한 잔혹함과 폭력성을 당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통치가 강하게 유지되고 있기 때문에 숨 쉴 공간을 확보한다(3:1-19).
격통 속에서도 바다를 건너가는 노루처럼 ‘의지의 미래’가 열린다. 훼손된 관계는 얼음 언저리를 걷는 삶과 같다.
그러나 단절과 침묵의 벽, 고립의 이야기 속에도 '서로를 이어갈 수 있는 성찰과 상상력'으로 '미래 산책 연습'을 할 수 있다.
<새로운 행복>
오만한 자율성은 관계를 단절시키고 서로를 침묵의 겨울로 내몬다. 배제와 무시, 혐오와 폭력을 행했던 자들에게도 회개(돌이킴)할 기회가 주어진다.
그러나 기회조차도 시효(時效)가 있는 법, 행복과 불행의 시작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
'개별적 주체성'을 존중하는 일상(일터) 체험과 '서로 이어짐의 의식(감각)', 이 두 개의 핵심 문법을 붙잡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모두가' 자유를 누리고 서로가 대등한 관계 속에서 사는 세상을 열망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