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태와 냉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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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괴력이 있다면 현재의 삶을 평이하고 자연스럽게 만들어서, 내가(공동체가)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 감각을 무디게 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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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주는 퇴폐와 소비하는 인간으로 전락시킨다. 지나치게 평범한 삶은 '보냄 받은 사명'을 갉아먹고 정성과 열정을 감퇴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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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치명적인 것은 존재하려는 저항의 힘(지향)을 꺾고 회의와 냉소에 빠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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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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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기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안일함(해이함)과 무례함(불손)으로 공동체 세움의 열의가 식어진 것을 포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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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력을 상실한 공동체가 다시 그 원기를 되찾으려면 처음으로 돌아가서(ad fontes) 성찰과 돌이킴, 말씀을 다시 살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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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개할 수 있는 아젠다(인물)를 확인하고 재설정하는 것이다. 다시 써가는 이야기가 필요하고 새로운 예언의 목소리가 울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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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소형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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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게 살려고 했으나 변하는 시간 속에서 교회의 원형질은 퇴색되었다. '정체성의 훼손'으로 세상성에 동화된 채, 맛 잃은 소금처럼 존재이유가 없어졌다(말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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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교회는 세상의 맨 앞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미 온 것을 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전위적 첨병 공동체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까지 계속 출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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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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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이 품었던 비전은 토라를 따르는 백성에 의한 토라의 사회적 구현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하여 기존 체제를 강고하게 지키려고 했고 들으려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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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는 밤마다 자신의 심장을 두드리는 토라의 '경세(經世) 외침'을 막을 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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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활이 걸린 말씀들로 가득한 토라의 이야기들은 해이해져 가는 공동체 안에 하늘의 수많은 별들이 내려오듯 박히고 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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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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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의 언어는 먼저 온 미래의 실제를 앞당겨 보여준다. 일종의 미래 퍼포먼스 내지는 미래 세상 만들기의 모델하우스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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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의 심성(mentality)은 되어질 새로운 세상에 대하여 먼저 매료되었거나 사로잡혀 사는 사람들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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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의 말씀은 한 마음으로 견고하게 새로운 내일을 기다리게 한다. 바울은 이것을 '소망의 인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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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희망은 매우 적극적이고 확신에 찬 기다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