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순종의 영(21절)
예레미야의 눈물은 상실의 눈물, 슬픔의 눈물, 자포자기의 눈물, 격분의 눈물이었다. 애가는 눈물을 보여주며 쓰라린 고통을 모은다. 그렇지만 눈물은 소망을 낳게 한다.
소망은 인간적 의지, 인간적 결정, 낙관론을 벗어나게 해준다. 눈물은 연약함이나 무능이 아니다. 사람들이 울 수 있는 용기를 갖을 때, 권력을 가진 남녀가 울 때, 주변과 세상은 변할 것이다. 눈물은 연약한 것이 아니라 강력한 것이다.
2. 부재와 침묵 너머로(22절)
예레미아 애가의 결론이 22절처럼 끝나고 있다는 것이 약간은 놀랍고 당황스럽기도 하다. 아마도 슬픔을 너무 빨리 혹은 너무 완전하게 ‘해결하도록’ 할 필요는 없다는 얘기로 들린다.
삶에서와 마찬가지로 시(詩) 역시 슬픔은 열려진 상태로 계속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신앙은 이런 슬픔에 마주할 수 있고 피드백도 가능하지만, 생생한 슬픔의 현실을 너무 낙관적으로 보려 할 수도 있다.
오직 믿음이란 이름으로 슬픔을 함부로 다뤄서는 안 된다. 고통과 슬픔의 현실이 가져다준 상실은 잘 지워지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성령의 새로움으로 살아가기
(롬 7:4-6)
1. 죽음의 열매(5절)
초심으로 돌아가려는 몸부림과 각고(刻苦)의 혁신이 없으면 좋았던 그 어떤 것이라도 퇴색하기 마련이다. 기독교의 위대한 사상과 교리라도 계승되는 과정에서 본말전도(本末轉倒)가 발생한다.
'모든 사람이 제사장이다'라는 종교개혁의 위대한 발견조차도 한국교회의 밑바닥까지 스며들기에는 아직도 진행 중이니 말이다. 끝물이 된 종교는 사람을 살려야 할 것인데 죽이고야만다. 올무에 걸리게 한다.
‘개혁된 교회는 개혁하는 교회다’라고 외쳤던 종교개혁의 구호는 지금도 유효하다.
2. 하나님을 위한 열매(4절)
예수께서 가져오신 하나님 나라의 복된 소식(승전보)은 하나님의 새로운 다스림(통치) 안으로 들어가 그 통치의 영광을 즐거워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를 믿을 때,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혔다가 살아나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4절에는 ‘가서’로 번역했는데 원어상으론 joined, 결혼하다)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 맺는 삶'을 살게 되었다.
3. 다른 섬김으로(6절)
바울이 볼 때 ‘이것 아니면 안 된다’ 식의 '그릇된 선민의식'은 모든 나라와 민족들이 사랑하고 섬겨야 할 하나님에 대하여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할례, 유대인의 절기와 음식법은 민족이 다르고 문화가 다양한 것을 인정하지 않는 꼴이 되었고 선교의 방해거리와 걸림돌이 되었다.
예수와 바울 당대의 이스라엘 종교(유대교)는 너무나 배타적이 되어 열방이 수용하려면 혁신이 필요했다.
4. 성령의 새로움
예수께서 몸소 보여주신(시범의) 하나님 나라는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별하게 만드는 협소한 율법 이해에서 오는 오용과 남용에서 출애굽 시켰다.
무소부재(無所不在) 하신 성령님은 새로움을 가져오고 새로움을 일으키는 분이다. 성령님은 새로운 해석과 분별을 촉진한다.
성령이 계신 곳에 자유와 해방이 있다. 새로운 설교, 새로운 섬김, 새로운 선택이 있는 곳에 자유케 하는 주의 영이 있다. 일상과 일터를 성령의 새로움으로!
<성찰과 실천을 위한 질문>
새로운 한 해 동안 하나님을 위해 어떤 열매를 맺고 싶은가를 적어보자. 이런 열매를 맺으려면 어떤 훈련과 무장이 필요한지 서로 이야기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