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욱 새롭고 활발한 영성이 나타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성숙하고 순종적인 물질성과 예수를 통해 몸을 입으신 창조주 하나님과 어떻게 연결할 수 있을까? 성숙한 물질성과 하나님 나라 복음은 서로 분리되지 않고 조화로운 묶음이 될 수 있을까?
이런 질문들에 만족할 만한 답변이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성숙한 물질성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임을 체득하는 것이다.
사랑은 창세 전부터 삼위 하나님의 상호 관계 방식이었고 아들의 성육신을 통해 드러났다. 십자가에 달린 성자 하나님 안에서 삼위 하나님의 사랑은 절정을 이룬다.
사랑은 선제적으로 먼저 상대방을 위해 아낌없이 내어주는 것이다. 예수의 삶 전체는 ‘자기 비움’(케노시스)으로(빌 2:1-6 보라) 일관한 사랑의 이야기로 충만하다.
하나님의 사랑은 삼위 하나님의 서로 안에서 사랑과 타자(인간)를 위한 사랑이 완벽하게 작동하는 것이다. 사랑의 구심력과 원심력의 에너지가 각각100%씩 절묘하게 발휘된다.
삼위 하나님께서 친히 보여준 사랑의 본(本)과 시범이 우리에게 이어지고 이제 흐르고 있다(17절).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했고, 사랑의 새로운 기운(루아흐)을 받아서 사랑하려는 존재, 사랑하는 삶으로 끝없이 전환(transformation) 중에 있다.
남을 사랑하고 있다면 두려움(낯설음과 생소함)이 들어올 틈이 없다. 두려움은 타인에 대한 배제와 무시 및 혐오의 진원지다. 두려움은 타자(이웃과 하나님) 없이 살려고 하는 어리석음이자 무지의 소치다.
자기 사랑(나르시시즘)은 내가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타자를 향한 개방과 자기 비움을 거절한다. '지옥'은 나 밖에 없는 곳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것이다(18절).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공동체 안에 있는 형제/자매를 미워하기란 워낙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교회 안에서 분열적 사랑이 실재한다면(하나님 사랑이냐 이웃 사랑이냐)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려야 한다.
옆에 있는 형제/자매를 미워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공공연하게 말하는 자가 있다면 이런 신앙은 '거짓된 것'이기 때문에 교정과 회개를 위한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20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