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부족함의 제국'을 따라간다면 교회는 이웃과 함께 하는 공동선을 수행할 수 없다. 성찬은 교회가 공동선의 사명을 굽힘없이 수행하도록 돕는 가장 가장 좋은 방편이다.
성찬은 부요함의 복음이 '부족함의 유사 아우성'을 뒤엎고 우리를 공동선으로 나아가도록 촉진한다. 성찬은 부족함의 시스템을 무너트리는 '하나님의 움직임'이다.
<새로운 상상력>
예수께서는 광야의 만나 이야기를 소환하신다(31, 34, 40절). 광야에서 터득한 부요함의 이야기를 대표하는 동사들이 보인다. 예수님이 가졌다. 예수님이 축사하셨다. 예수님이 떼셨다. 예수님이 주셨다(41절).
부요함의 복음으로 살아가는 자들에게 흘러 나오는 기풍이다. 열두 광주리나 남았고 예수는 부요함의 이야기를 한번 더 시연하셨다(막 8:1-10.)
<쉽게 잊어버림>
불행하게도 부요함의 이야기는 자주 무시되거나 망각된다. 예수는 제자들이 부요함의 사건을 단회성으로 생각하지 않고 존재와 삶을 견고하게 하는 기반이 되기를 원하신다(막 8:17-21).
예수는 뼈속까지 부족함과 불안의 이야기에 갇혀 사는 우리에게 감사와 선물로 살 수 있는 새로운 길, 이웃 사랑의 공동선으로 초대한다.
<부족함의 서사>
세상과 교회나 '부족함의 이야기'를 믿고 산다. 이 서사에 들어가면 탐욕스럽고 배제와 혐오를 일삼고 듣지 않으며 힘을 남용한다.
성찬도 부족함의 이야기를 극복하지 않고 행해질 수 있다. 탐욕과 소유적 자유를 제어하지 않은 채 먹고 마실 수 있다. 탐욕과 불안의 표심은 바로 왕과 같은 우리 욕망의 아바타를 뽑을 수 있다.
<악몽을 전복하는 꿈>
은혜(헤세드)와 진리(에메트)는 항상 우리 곁에서 '부요함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탐욕과 불안의 시스템을 떠난(출애굽) 사람들은 안식일도 없이 생산과 효율의 톱니바퀴에 돌고 있는 자신을 인지한 자들이다.
희년의 대동세상을 소망하는 교회는 예수의 살과 피의 분여(share) 속에서 새로운 꿈을 꾼다. 결혼과 육아를 걱정하지 않는 사회, 적당한 내 집 마련, 노후가 보장된 삶 같은 것이다.
<유월절의 신비>
성찬은 부요함의 초대 속으로 들어와서 염려하지 않는 것이다. 성찬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있어야 할 것을 풍성하게 공급해 주실 것을 믿는 것이다.
우리는 성찬을 통해 마 6:33을 순종하여 이웃을 돌아볼 때 '모든 것을 더해 주시는' 신적 선물의 신비를 체득한다.
우리가 '감사와 선물의 이야기'를 써내려 갈수록 자신을 넘어서는(pass over) 변모(變貌)의 영광을 지금 여기서 누리며 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