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능 사회>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절대적 무능보다 더 무서운 것은 공인으로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모르거나 알았다 해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평소에 다른 생각을 했거나 다른 이야기 속에 살아왔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를 풀 수 없다. 서쪽으로 가지 않고 동쪽으로 간 셈이다.
한 사람의 목숨을 자신의 목숨처럼 생각하질 않았다. 돈독 오른 탐욕사회가 나은 부당거래, 진상규명 실패, 당쟁의 프레임에 깊이 수몰되었다.
<마비 사회>
사람이 하늘이 되는(人乃天) 최고급 사상을 밟아 온 우리에게 사람을 파리 목숨처럼 대하는 그동안의 감춰졌던 생각이 검은 불을 뿜어 댔다.
초고속 압축성장의 뻥 뚫린 살갗으로 정신나간 사람처럼, 사람 사는 것처럼 살아가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
그렇다면 지옥 같은 세상을 만든 '그런 인간'과 우리는 과연 얼마나 '다른 인간'인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우리는 '어떤 인간'이어야 하는가?
<낡은 사고>
세월호 리본을 달고 다니면 불온한 자로 낙인 찍는 시대는 지났다. '모두가' 자유를 누리는 사회를 궁리하는 것이면 충분하다. 남녀를 갈라 치는 혐오의 정치는 당장은 통했을 수도 있지만 이제는 설 자리가 없게 될 것이다.
격차를 더해 가는 불평등을 논외로 하는 모든 이야기는 허구적 관념이다. 우리는 청년 고독사, 청년 노동자의 죽음을 기억해야 한다.
<신적 유기감>
요한복음 14장의 표면상 그림은 예수의 임박한 죽음이고 제자들과 예수의 분리이며, 하나님과 예수의 분리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내팽개치셨나이까?’
제자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내버려지는, 십자가의 참혹한 실상을 보고 실족한다. 신적 유기감이 파고들면 제자들은 고아의식을 느낀다.
내동댕이쳐지는 예수와 그 버려지는 스승을 지켜봐야하는 제자들의 비통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우리가 세월호를 생생하게 지켜봐야 했던 것처럼..
<결속의 영>
예수께서 다른 보혜사인 진리의 영을 보내 주시겠다는 말씀 때문에 조용한 희망이 생긴다. ‘곁에서 기운을 북돋우는 위로자’이신 성령은 제자들이 버림받았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예수와 강고한 결속을 만들어 주실 것이다.
하나님은 그날 차갑고 어두운 심해에서도 그들과 함께 하셨음을 보게 하신다.
아이들은 고아처럼 버림받고 흉측한 몰골의 주검으로 돌아왔지만, 이제는 산 자들이 피눈물 닦고 손에 손잡고 이들의 죽음 너머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고 광장에 운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