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중(時中)
(전도서 3:1-8)
1. 생명의 도래
물리적인 시간은 막을 수 없고 흘러만 간다. 그러나 그 시간을 채우는 것은 우리의 일이다. 따라서 '무엇으로 시간을 채워가느냐'의 문제는 세계관 내지는 가치관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를 만든다.
그렇다고 우리의 원함이 시간 속에 모두 채워질 순 없다. 많은 변수들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것을 선택하지만, 관계와 환경 때문에 실패하거나 절반만 성취하기도 한다.
설교자(코헬렛)는 인생(시간)의 신비를 깊이 성찰했다. 뭔가 잘 될 것 같았지만 요지경처럼 전혀 다르게 나타나는 헛됨(무익)의 지속적인 마력(魔力)을 절감했다.
전도자는 잠언의 지혜가 2% 부족하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의 삶은 예상과 달리 자주 꼬이는데도, 지혜는 너무 낙관적이고(지혜는 마치 만병통치약 같고) 단언하는 듯한 소리(지혜 없으면 죽음과 패망이야!)를 한다고 보았다.
코헬렛은 이런 입장과 거리를 두려는 듯 하다. 오히려 생명이 찾아오는 시간과 시절을 마음에 두었다. 생명을 사랑하라!
2. 여백과 우연
변화무쌍한 세상에서 정답이 어디 있겠는가? 움직이고 바뀌는 세상에서 '절대적인 불변의 상태가 존속될 수 있다'는 말(言)보다는, 지금 여기서 내게 주어진 상황을 잘 살펴야 한다.
과도한 낙관도(신앙지상주의) 과소한 허무의 길(현실에 짖눌린 패배주의)도 아닌, '밝은 상황이해'(해석)를 연습하고 체득함이 좋다.
행불행(幸不幸)에 대하여 일희일비 하지 말자. 내 탓도 멈추고 남 탓도 그만두자. 오히려 우연(그렇게 일어나게 된 것)에 여지를 두고 삶에 대한 유연함과 열린 사고를 연습하자.
모든 때(시간, 시절, 시대)는 전쟁이든 평화이든 각각 나름대로 의미가 있기 때문에, 선이냐 악이냐의 엄밀한 도덕적 판단(잣대)을 신중하게 해야 한다.
다음과 같은 질문이 더 유의미하다. 1) 하나님의 주권이 어디 있을까?, 2) 하나님은 우리 속으로 올 수 있는지?, 3) 하나님은 우리의 운명에 무관심 한 건 아닌가? 등 여러 어려운 질문과 고뇌 속에서도 ‘정직한 진술’을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
3. 때에 맞는 행동(시중時中)
하나님께서 이 일을 우리가 행동하기 원하는지를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까? 우선 우리가 어떻게 행할지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일에 참여해야 한다. 관망만 해서는 안된다. 불 난 집 구경하듯 보고만 있는 것도 아니다. 진지하게 참여하고 연루되지 않으면 ‘때에 맞는 행동’이 나올 수 없다.
작금의 형국은 보존되어 왔던 가치나 문법이 훼손되는 시기를 보내고 있다. 우리 사회는 동토의 겨울 왕국처럼 기괴하고 엉망진창으로 기울어 간다.
이런 험지(險地)에서 나의 행동, 교회의 기도는 더 많은 사람이 행복하고 돈 때문에 비참해지지 않도록, 우리 모두는 서로 '연결된 존재'라는 의식을 갖고 살아가는데 일조(一助)할 수 있어야겠다.
<성찰과 실천을 위한 질문>
서로 경청하고 공감하면서 안전한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우리는 어떤 내공과 연습을 해야 하는지 이미 훈련했던 항목을 나누고 그 열매도 이야기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