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명(1-2)
임마누엘이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려고 우리 옆 집에 이사 오신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은 그분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증강되고 확장된다는 말이다.
생명은 자라고 번식하기에 우리의 영혼도 생명이 있다면 변화와 성숙을 거듭하고야 만다. 죽은 것은 말이 없듯이, 죽은 교회는 적막하고 황량하다. 죽음은 모든 것을 멈추게 하고 굳어 버린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생명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생명과 접촉하며 더 생명으로 충만해질 수 있을까? 오늘 나의 영적인 상태를 진지하게 성찰해 보자.
우리 사회는 죽음이 자욱하게 깔렸다. 왜냐하면 누구는 배제되고 어떤 이들은 무시당하며, 심지어 특정인을 찍어서 혐오까지 한다.
배제, 무시, 혐오의 기저에는 뭐가 있을까? 돈이 최고가 되어 버린 사회가 있을 뿐이다. '돈이 안된다'는 말은 ‘너는 쓸모 없어, 당신은 효율이 나지 않는 자야’란 말과 같다.
‘사회적 다위니즘’의 강고한 바벨탑이 앞뒤에서 우리를 짓누른다. 적자생존과 약육강식, 정글의 법칙만이 흐른다. 경쟁밖에 없고 우열만이 최고이며 지배는 불가피할 뿐 아니라 당연한 것이라고 서슴없이 말한다.
이럴 때일수록 교회의 '위대한 거부'가 절실하다. 왜냐하면 교회는 하나님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2. 사귐(3)
하나님과 사귀고 있는 사람은 다른 이들과 사귐 속으로 들어간다. 우리의 코이노니아(사귐)는 신적 관계의 연장이다. 성령의 사귐(코이노니아)이 영속적인 이유는 '먼저' 내어 주는 사랑이었기 때문이다.
먼저 사랑하신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에 인간도 사랑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사랑이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우리는 성령의 코이노니아를 믿는다. 교회는 성도의 사귐으로 존재하며 '우리는 성도가 서로 교통(코이노니아)하는 것을 믿는다'(사도신경).
성령은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공평하고 평등하게 찾아 오신다.
성찬의 영광은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모두에게 골고루 나눠지는 것이다. 예수의 살과 피를 받은 자들은 서로를 향해 '살과 피'의 행함과 진실함으로 먼저 사랑한다.
예수의 살과 피를 함께 받은 자들은 서로(먼저) 형제 사랑을 하며 우는 자들과 함께 울며, 기뻐하는 자들과 함께 기뻐한다.
교회 주변의 우는 자들과 함께 울자. 괴로워하는 가족, 친지들 곁에 그냥 조용히 있어주자.
3. 기쁨(4)
생명의 관계는 교회를 신명나게 한다. 충실한 사귐은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다. 생명의 사귐은 희락을 낳는다. 생명의 영이신 성령께서 살 맛 나게 해 주신다. 성령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도록 도우신다.
새로움을 주시는 성령은 그리스도와의 친밀함을 촉진하고 강화해 주신다. '그 어디나 하늘 나라'를 누리게 해준다.
먼 곳에서 친구가 찾아오는 것도 기쁜 일이지만, 일주일에 한 번씩 예배와 식사 및 삶 나눔은 기쁨의 정(情)이 쌓이는 복되고 위대한 성도의 교제다.
우리가 제대로 진리(원칙)를 따라 살아갈 때 서로는 기쁨을 느끼며 감사도 넘친다. 그러나 오늘날에는기쁨과 감사가 매우 줄어든 시대다.
죄는 무지와 어리석음인데 특히 무지(반지성주의)가 부패보다 더 끔찍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성찰과 실천을 위한 질문>
생명을 사랑하면 기쁨이 온다. 지위고하를 불문하고 대등하게 서로 사랑하며 코이노니아 하면 희락의 햇살이 임한다.
살맛 나는 교회와 가정과 일터를 성령의 새로움 안에서 일구자. 세상이 줄 수 없는 생명과 사귐에서 오는 기저급한 일상의 퇴폐성을 극복하고 성령으로 기뻐하셨던 예수님처럼 '생사기 품세'(생명, 사귐, 기쁨)를 한 주 동안 연마하고 누려본 시간을 지체들과 나눠보세요.을 누리며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