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심연과 고통의 깊음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원함은 무엇인가? 하나님을 향한 '철저한 기다림'은 무엇을 보기 위한 것인가? 하나님을 향한 터질듯한 열망의 외침(기도)은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 러시아 정교회는 온전한 교회와 인간됨(영성)에 있어서 세 가지 요소를 강조한다. 제도(전통), 지성, 신비다. 베드로를 제도와 전통의 상징으로 바울을 지성, 요한을 신비로 대별하기도 한다. 서구 중세의 신앙 전통 속에서는 ‘철저한 놀라움’을 갖고 하나님의 존재를 향해 달려가거나 목마른 사슴처럼 갈망하는 길이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깊은 욕망을 보게 된다. 폭력과 지배하려는 모습과도 직면한다. 육신에 속한 자아를 보며 절망하는 소위 ‘영혼의 어두운 밤’을 겪는다.
우리는 ‘철저한 놀라움’을 갖고 하나님을 향해 달려가거나 목마른 사슴처럼 갈망한다. 이 과정에서 인간 존재의 깊은 욕망을 본다. 폭력(지배)도 보게 되며 육신에 속한 자아를 보며 절망하는, 소위 ‘영혼의 어두운 밤’을 겪는다. 시편 130편의 시인도 이런 부정의 길에 깊이 들어선다. 하나님을 그리워하며 열망하고 부르짖으며(1절) 철저하게 기다리며(5-6절), 대망한다(7절). 하나님 체험, 신비적 영혼의 깨달음(돈오頓悟)은 자신이 스스로 겪게 된 영혼의 어두운 밤을 관통하여 세상의 어두운 밤으로 향한다. 3절의 죄악은 8절에서 이스라엘 공동체(사회)의 죄악으로 확대된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확인해 볼 체크리스트가 있을까?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항상 ‘사랑의 병을 앓는’ 존재다. 정화되고 깨닫는 사랑, 스랍을 지나 하늘로 올라 결합하는 사랑, 하나님의 뜻(의지)과 연합하는 사랑, 영혼을 그리스도께 맞춰 하나님과 인간의 사랑을 완성으로 이끄는 사랑이 절실하다. '거룩한 힘'은 사유화된 소유(지배)가 아니라 힘을 나누는, 다른 사람을 강하게 만드는 것으로 전진한다. 이것은 좋은 힘이자 다른 존재를 북돋아 주고 채워주는 힘이다. 따라서 '인간의 참된 신비적 과제는 소유와 지배의 충동에 맞서는' 것이다(부버). 창조란 나누는 힘이며 녹색의 힘이다.
생태영성은 다른 이들(타자)의 모습 그 자체를 경외하고 존중한다. 삶은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되고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생태영성은 자연의 지배자와 소유자가 되려는 욕망과 습관을 반격한다. '변혁적이고 신비적 영성'은 사사화된 영적 추구를 뛰어 넘어 우리가 참여하는 세계의 지속적인 창조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생태영성은 공동체성을 가진 신비적 영성이며 모두를 위한 영성이다. 하나님 때문에 행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친밀하고 신비적인 연합과 결속은 점수(漸修)가 필요하다. 침묵의 수련은 기다리는 것이다. 침묵을 통해 우리 자신으로부터 빠져나와 하나님의 능력의 공간 속으로 들어간다. 바라봄은 열려짐이다.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기적을 추구하거나 저 멀리 있는 다른 어떤 세상을 희망하는 것이 아니다. 걱정과 관습, 용기 없음에서 출애굽(자유)하여 모두를 위한 구원과 해방에 참여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 안에 내주하신다는 것은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대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발전한다. 하나님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모두에게 조명하시고(illuminate) 마음에 자신을 새겨주신다. 조명과 새겨주심은 특정한 사람의 전유물이 아니다. 사회에서의 신분, 생물학적인 나이, 권력의 유무, 소유 정도, 피부 색깔이나 성별은 하나님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속물들이 난무하는 시대다. 속물들은 새로움을 향하는 것에 맞서고 자신을 지키려고 애쓰며 자신의 욕구를 쌓아가려고 최선을 다한다. 시니어들은 경험을 청년들과 공유하고 청년들은 새로운 삶을 장년들에게 제공한다. 이런 영적 수련을 통해 ‘점검된 삶’을 사는 자가 되어야 한다. 성찰하지 않는 삶은 폭력을 낳게 되는데 고통을 다루는 방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매일 죽음을 눈 앞에 둘 때'(성 베네딕트) 일상과 일터의 위대함과 영광을 보는 눈이 열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