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4:31-44
구별된 거룩한 곳이라고 생각했던 회당에서 더러운 귀신의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다(33절). 비정상의 정상이 된 흉측한 사회의 단면이다. 예수는 권위와 능력의 말씀으로(36절) 악의 축을 꾸짖고 해방의 실제를 구가한다. 최근에 일어난 반인권적이고 사이코패스적인 사건은 우리 사회가 중병에 걸렸고, 괴물을 양산하는 위험한 공동체가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모두가 신도(新道)의 출현을 타는 목마름으로 기다린다.
눅 5:1-11
경험의 깊이, 전문성의 노련함도 때로는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을 때가 있다. 경험의 한계를 뛰어 넘어 '새로운 초대'가 흐르는 시간이다. 예수는 우리가 '새로운 존재'가 되어 '새로운 경험'으로 전진하도록 돕고 계신다. 예수는 '촉진하는 말씀'이자 '예기치 못한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분이다. 한계와 결핍을 처절하게 느끼며 절망을 해 본 사람은 탄식하며 절급하게 호소한다. 예수를 따르는 것은 '신적 부요함'에 연루되는 것이다. 인간은 경제적인 핍절, 전통과 관행의 굴레 속에서 유월하는 구원(자유)을 선망(羨望)한다.
눅 5:12-26
나병은 사회적 단절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상태다. 이미 격리되었고 저주와 혐오의 상징이 된 병이다. 예수는 치유를 통해 사회적인 관계를 상실해 왔던 자에게 회복과 자유를 주신다. 배제와 혐오가 송곳처럼 돋아 있는 사회에서 깨끗하게 나음을 입을 수 있는 '샬롬사회'는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 예수의 하나님 나라 복음은 위기사회를 초래한 불법과 부당거래로부터 정의와 자비의 삶으로 돌이킬 수 있도록 선회(旋回)의 길(죄 사함의 길)을 열고 초대한다.
눅 5:27-39
하나님 나라 복음은 옛 질서의 지배 속에 살았던 사람에게 꼬리표를 달지 않는다. 회심한 사람은 그 변화의 표시로 식탁을 차린다. 하나님 나라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잔치의 나라이며, 먹고 마시며 흥이 있는 밥상 공동체다. 예수께서 보여주신 하나님 나라는 기쁨 속에서 진지한 삶을 서로 나누고 수용하는 새로운 공동체다. 성령의 희락 속에서 경청과 안전한 공간을 향유하는 곳이다.
눅 6:1-11
예수는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가 사라지고 외형과 교조성에 빠진 것을 개탄하셨다. 예수는 안식일을 제의적인(ritual) 행위로만 축소하는 것에 대하여 강력하게 반대했다. 안식일은 선(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생명을 구하는 날이다. 안식일은 ‘그건 아니오’라는 이의제기를 배우며 실행하는 날이다. 안식일은 존재하는 것을 잃어버리고 소유와 자기애 속에 빠진 자들에게 새로운 길과 생명을 맛보아 알게 한다.
눅 6:12-26
하나님 나라 복음은 복의 이야기로 초대한다. 누구나 하나님의 임재 속에 엄호를 받으며 위풍당당하게 살 수 있도록 부른다. '담대한 겸손'으로 눈을 보며 말할 수 있는 의연함으로 충만하다. 지금 부요한 것은 남을 억압하고 강탈한 것이기 때문에 위험하다. 배부른 것도 공평과 정의로운 방식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필귀정(事必歸正)이다. 26절은 우리 시대에 중요하게 가르쳐야 할 천상의 소리다. 예언자들의 총합적 결론이다. 26절에서 자유로울 사람 없다. 신학자들과 영적 리더십들에게 폐부를 찌르는 명약이다.
눅 6:27-38
하나님 나라의 제자도(Kingdom Ethics)는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다. 사회적 관계는 뿌린 만큼 거두기 때문에 칭송과 영예 얻기를 바란다면 사람을 선으로 대해야 한다. 원수 사랑의 함량을 높여가는 교회와 구성원들이라면 '과격한 용서'를 할 수 있다. 한계를 정하지 않는 용서의 힘은 예상을 뛰어넘는 수혜와 혜택을 얻게 될 것이다. 오늘 본문이 자칫 뻔한 답처럼 모든 문제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덮어 버리라고 읽으면 안된다. 비판도 말고 정죄도 해서도 안 되며 무조건 참는 모습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