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8:40-56
인간과 사회의 어찌할 수 없는 곤경과 질곡 앞에 예수께서는 회피하지 않고 직면한다. 하혈하는 병으로 사회적 단절 속에 살아온 인생을 마주한다. 열두 살부터 불결 판정을 받고 ‘혼밥 인생’이 된 사람은 구원자 예수를 알아챘는지,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들었는지 모르나 천기(天氣)를 느꼈다. 불결을 전염하는 것은 중죄에 해당되었지만 용기를 내어 예수의 옷에 손을 댄다. 여러 장애물(편견, 고정관념 등)을 극복하고 행하는 믿음이었다. 여인의 믿음은 두려움을 넘어 하나님과 약속의 말씀을 붙잡았을 때 새로운 시간을 만들고야 만다.
눅 9:1-17
누가는 예수가 가르친 내용이 하나님 나라였다고 명시한다(4:43; 8:1; 13:18). 예수의 제자들도 하나님 나라를 전할 때 무소유적인 삶의 방식으로 보내졌다. 작금의 교회가 터보 엔진을 가진 배처럼, 돈과 힘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과 다르다. 누가의 하나님 나라는 메시아적 잔치가 펼쳐지는 광야의 식탁이다. 성찬은 새 출애굽을 경험한 공동체의 밥상 코이노니아다. 삼삼오오 둘러앉은 무리는 자유로운 평등적 공동체를 누린다.
눅 9:18-27
하나님 나라 제자도는 예수를 ‘계속해서‘ 따르는 것이다(23절). 부귀영화에 물든 사람은 예수를 따르기 어렵다. 예수를 따르는 것은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다. 자기 부인은 삶의 우선순위를 명확하게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 마음을 철저히 바꾸는 진실한 믿음과 참된 회개가 있어야 한다. 평생 예수 따름의 공동체로서 교회는 개인적으로 날마다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삶이어야 한다.
눅 9:28-36
예수는 모세의 출애굽 선행(先行)을 자신의 '떠남'(출애굽)을 통해 성취하신다. 예수는 십자가, 고난, 부활, 승천을 통해 새 출애굽을 마무리하신다. 예수의 변모(變貌) 사건은 부활의 선제적 전시(display)다. 제자들은 피곤하고 졸기에 바쁘다. 은혜의 조각구름은 제자들이 모세와 엘리야를 볼 수 있도록 배려한다. 형언할 수 없는 천지개벽의 서막 앞에서 하늘의 신언(神言)은 예수에 대한 공적 확증이다. ‘나의 아들, 내가 택한 자’는 메시아라는 말이다. 세상의 길과 진리와 생명이라는 말이다.
눅 9:37-50
'말씀의 임함'과 '능력의 나타남'은 하나님 나라의 현존(presence)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이다. 출애굽 선교 모델이자 예수의 선교 방식이었다. 제자들은 어떤 이유로 실패했을까? 44절에서 “이 말들을 너희 귀에 담아 두라” 즉, 예수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메시지다. 제자들은 고난과 십자가를 관통해야 하는 메시아의 길을 애써 외면하고 46절에 '부귀영화'를 선점하려고 안달이다. 어린아이처럼 가장 작은 자로 존재하려는 것은 가장 큰 자로 살아가는 것이다. '존재하는 자'는 진정한 연대와 참된 협력을 할 수 있다. 게토화(고립화) 되어가는 교회가 들어야 할 시급한 왕의 전언(傳言)이다.
눅 9:51-62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다른 이들에 대한 배타적인 태도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 대해 배타적이라면 수용하고 용서하면 된다. 자기 존재감이나 정체성이 분명하면 나와 다른 견해라고 해도 마음을 닫지 않는다. 예수를 따르지 않는 자는 영적으로 죽은 것과 같기 때문에 장례 치르는 일도 배제할 만큼 예수를 따르는 것은 철저하고 급진적일 수밖에 없다(60절).
눅 10:1-16
자크 엘륄도 언급했듯이, 그리스도인은 이리 가운데로 보내진 양과 같다.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길이자 삶의 방식이다. 교회는 전진해 온 하나님 나라의 실체를 살아내고 유지하도록 '전위적 부르심'을 받았다. 교회의 영광과 아름다움은 개인과 사회를 제대로 세우기 위한 '해체와 재건의 질문'을 갖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