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10:17-24
귀신들이 복종하는 것과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과는 어떤 관계일까? 더 중요하고 본질적인 것에 집중할 것을 언급한 것 같다. 작은 전투에서 승리한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 나라 제자도의 삶을 살아가는 자들의 일상생활을 더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궁극적인 소망은 사탄의 나라가 종식되고 하나님의 전면적인 통치의 영광을 보는 것이다.
눅 10:25-42
우리 시대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 비유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웃의 범위를 스스로 정하지 말고, ‘우리 이웃’에 대한 정의(定意)를 확장하라는 것이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가 던지는 메시지는 우리가 이웃을 ‘가진’ 것을 넘어 우리 자신이 이웃이 ‘되어 주어야’ 함을 언급한다.
사랑은 이웃의 범위를 제한하지 않는 것이다.
눅 11:1-13
예수는 우리에게 하나님과 인간의 일상을 위한 기도에 대해 가르친다. '기도의 집요함과 뻔뻔함'은 구하다가 뭔가 보이지 않는다고 포기하지 말고 찾으라고 하신다. 찾았는데도 어떤 결과가 없더라도 멈추지 않고 시끄럽도록 문을 두드리라고 하신다. 이토록 강렬하고 열망적인 기도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성령을 구하는 기도는 결사적일 수밖에 없다. 성령에 붙잡히고 강한 이끌림을 받는 것은 일상과 일터에서 어떤 삶을 살 수 있는지를 가늠하는 지표가 되기 때문이다.
눅 11:14-26
귀신 축출은 하나님 나라(통치)가 메시아 예수를 통해 이미 관철되고 있다는 것을 시위하는 강력한 퍼포먼스다. 죄와 죽음의 지배에서 자유와 생명의 다스림으로 전환된 것을 의미한다. 악과 고난으로 점철된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비와 정의가 지역적이고 지구적으로 개시된 것이다. 하나님의 새로운 통치를 반대하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거부하고 대항하는 개인이거나 세력이다.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고 인권을 유린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을 만든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자 반역이다.
눅 11:27-36
교회는 가족주의를 능가하는 공동체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들의 모임이다. 예배와 코이노니아(성도의 사귐)는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않은지 살펴보도록” 돕기 때문에 중요하다. 예배와 사귐은 예수의 정체와 말씀을 깨닫도록 '마음의 눈이 흐려지는 것'을 막는다. 예수의 말씀을 제대로 받을 수 있는 마음의 눈은 인생의 방향을 좌우한다.
눅 11:37-54
무엇이 중헌디? '자기 확신'에 빠지면 남만 보이는가 보다. 예수는 종교 귀족들의 이면에는 탐심과 허영이 가득하다고 봤다. 직업적으로 양아치는 아닐 수 있으나 쌍스러움을 면치는 못할 것이다. 토라의 본질(정의와 사랑)을 잃고 생명에게서 멀어진 제의적 종교만 남으면 세상의 구원을 향한 하나님의 열망을 잊는다.
눅 12:1-12
모든 것이 투명하게 드러나는 시대다. 외식과 속물성은 시간문제일 뿐 곪아 터진다. 한국 사회는 감춰졌던 것과 숨긴 것이 모두 밝혀지는 광명의 변혁기다. 위선과 허위의식에서 벗어나는 길은 무엇일까? 제의적 초보를 버리고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성숙한 신앙으로 전진하는 것이다(히 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