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12:13-34
온갖 탐심을 물리치거나 멀리할 수 있는 왕도(王道)는 없다. 인간은 자신을 위해 쌓아두기를 원하는 안전지향의 본능을 갖고 있다(21절). 염려와 근심에 얽히는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 대자연의 새들과 백합화 및 들풀을 묵상해야 한다. 탐심에 대한 예방책(백신)은 '우선순위와 가치에 대한 회심'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나라)를 먼저 구하는 것이다. 소유한 것을 나누고 기부하는 삶은 선(하나님의 뜻)을 하늘에 쌓는 것이며, 하나님 나라를 열망하고 있다는 강력한 반증이다.
눅 12:35-48
하나님의 백성은 맡겨주신 자산을 하나님의 뜻대로 관리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재림(Second Coming)을 믿는다면 깨어 대비하며 신실한 청지기로 소득을 남긴다. 제자들은 충성스럽게(faithful) 집을 관리하며 일하는 자들에게 식량을 공급해 줘야 한다. 책무를 다하지 않고 나눠 줄 소출이 없다면 주인이 와서 ‘엄히 때리고’(파문하거나 해직하다) 심판할 것이다.
눅 12:49-59
불의 성령이 사회에 임하게 되면 그는 진리의 영으로서 진정성에 대해 담금질을 할 것이다. 시비(是非)와 선악을 분별할 줄 아는 사람은 성숙한 신앙인이다(히 5:14). 이를 위해 '질문'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 '의심'을 거친 믿음으로 정초(定礎)하며, '해체'를 통한 재건의 실체를 만들어야 한다. 코로나는 그 누구도 예외를 두지 않고 정화의 풀무불 속으로 우리를 밀어 넣었다. 기독교 본연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야 할 '아픈 희망의 카이로스'다.
눅 13:10-21
안식일은 사람이 참된 안식(자유. 해방. 회복)을 실효적으로 맛보는 '자비의 카이로스'다. 하나님 나라 복음은 안식일이 안식일 되도록 한다. 교회는 안식일의 정신(자비의 제도화)을 사회 속에서 구현하는 데 앞장선다. 하나님 나라 복음은 '생명이 커지는 성장'에 대해 말한다. 양극화와 청년 일자리가 줄어드는 위기에서 기본소득은 모두가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가려는 것이다.
눅 13:22-35
예수 당시에도 구원받는 자들의 범위에 관해 진지하게 고민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부패한 종교의 끝물에는 종교적 배제의 상징이었던 이방인들도 하나님 나라 잔치에 참여하는 새로운 방식이 나타난다(29절). 교회에 소속되었다고 모두가 좁은 문으로 들어왔다고 볼 수 없다. 아침마다 새로운 하나님의 자비가 있다 해도 원하지 않을 때 하나님을 볼 수 없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교회의 최후는 쫓겨나고 슬피 울며 회한으로 가득할 것이다(28절)
눅 14:1-14
제의적 종교에 물들면 상식과 합리는 뒷전으로 밀려나게 마련이다. 예배 성수와 십일조 준수만 강조할 것이 아니라 일상과 일터에서 어떻게 안식일을 구현할 것인가를 나눠야 한다. 하나님 나라 복음은 자신을 낮추는 케노시스(예수 메시아의 낮아지심의 극치)의 가치를 중시한다(겔 21:26). 교회는 ‘인격의 존엄성’을 강조하는 전'도'를 해야 한다. 복된 인생이란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끝없이 묻고 실천하는 것이다.
눅 14:15-24
하나님 나라는 잔치에 초대하는 이미지로서 그 대상은 사회적으로 무시당하는 사람들이다. 화기애애한 잔치를 만들려고 했지만, 참여를 거부한 사람들은 부자들이다(18-19절). 펑크가 나서 비어있는 좌석을 채우려고 힘을 쓴다(청하고 데려오거나 강권하면서). 신분이 더 낮은 자들로 점점 더 채워진다(16, 21, 23절). 하나님 나라는 부자들에게 거부 될 수 있고 소외된 자들에 의해 충만해질 수 있다. 교회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으며, 이종(異種)의 사람들이 함께 먹고 마실 수 있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