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적 삶의 방식을 뿌리내리려면 두 가지의 훈련이 필요하다. 경청을 연습하는 것과 안전한 공간이 되는 훈련이다. 경청은 타인에 대한 존중에서 시작한다. 자연세계를 염두하고 나와 뗄 수 없는 사이임을 생각할 때 가능하다. 자기주도성이 때로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방해할 수 있다. 소망의 인내는 하나님 속에 베인 '선교적 겸손'이다. 답을 주기 위해 애를 쓰는 것도 때로는 다양성 안에서 조화를 이뤄가는데 소음이 될 수 있다. 경청이 있는 곳에 고통에 대한 진실한 공감이 있다. 동감(同感)이 있는 시간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이어지는 살과 피의 코이노니아가 있다.우리 시대는 불확실성과 모호함이 갈수록 삶의 일부가 되고 있다. 정답이 없더라도 하나님께서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심을 느끼자. 주께서 만물을 붙들고 계시기 때문에 염려와 두려움보다는 일상의 작은 일에 충실할 수 있다. 타인의 고통을 느끼며, 사회와 자연 세계의 신음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깨어 있는 것이고 살아 있다는 얘기다.
역대하 7:11-22에서 땅의 문제는 비단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문제만이 아니라 영적인 차원과 연결되어 있다. 죄의 문제는 단지 사적인 문제가 아니라 자연과 역사 속에서 발생하며 하나님의 다스림과 관계 있다. 땅은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의 생태계일 뿐 아니라, 사회적 생태계이기도 하다. 자연과 물질계를 총칭하는 땅은 인간이 죄를 범하면 '토해 버린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레위기 18:25, 18:28, 20:22 찾아 읽어 보라).‘땅이 토한다’는 것은 아벨의 피로 인하여 땅이 부르짖는 것처럼, 죄에 대해 탄식하고 흐느끼며 파괴에 대해 신음한다는 말이다. 죄가 자행되는 곳에 하늘에서는 슬픔과 분노, 탄원이 섞여있다. 샬롬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역대하 7:14절은 하나님의 다스림(통치)이 어떻게 땅을 통해 구현되는지 간결하고 명료하게 밝힌다.
죄의 결과로 인한 저주와 심판은 땅을 황폐한 불모지로 바꾼다. 혼돈과 무질서가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창조의 세상을 해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잘못을 깨닫고 악행을 돌려 회개할 때 하나님은 용서하고 그 실효적 조치로서 창조 세상을 회복한다. 땅의 상태(자연적 생태계)는 거주하는 사람들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반영한다. 땅은 하나님이 세상을 어떻게 다스리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중요한 바로미터다. 인간의 탐욕과 악행은 자연 파괴가 불가피하고 생태계 파괴로 나타난다. 생태계가 망가졌다는 것이 하나님의 징벌이자 심판이다. 인간의 회개는 하나님의 용서로서 파괴된 생태계의 회복을 얻는다. 땅의 상태는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 인간이 세상을 향해 책임을 갖고 있다는 중요한 지표다. 인간이 자연과 뗄 수 없는 관계로 묶여 있기 때문에 자연의 상태는(특히 동물의 상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메시지라고 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