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피상성에서 깊이로
겉모양만 보는 것이 위험한 이유는 그 터가 부실하여 나중에 무너짐이 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피상성의 함정'은 변화하는 인간과 계속 바뀌고 있는 사회를 보려고 하지 않기에 관성과 관행의 행습으로 굳어져 버리게 된다. 시인은 '두터운 깊음'이 하나님 안에 있음을 알기에 하나님을 향해 소리를 낸다. 개인과 공동체가 치명적인 무너짐을 겪을 수 있다는 다그쳐진 마음이 맴돈다. 진리가 깊고 고통도 깊다.
당연하다고 생각해 왔던 것들에 대해 의심하고 질문하는 것은 세상을 심층적으로 바라보려는 몸부림이다. '두터운 깊이의 성찰'을 상실한 곳에는 관계의 상실, 경제적 파탄 등 안타깝고 비극적인 일들이 발생한다. 내가 존재하는 이유, 삶의 의미와 가치를 다시 묻고 제대로 실천(순종)하기 위해 철저하게 기다린다(5절). 소음을 걷어내고 참된 신호(주의 말씀)를 얻고자 집요하고 절실하게 기다린다(6절).
2. 삶의 깊은 곳과 대면하기
교회만이 개인의 울부짖음과 사회의 깊은 곳에서 아우성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교회가 다시 깊은 곳에서 간구하고 살펴야 하는 이유는 희망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7절). 교회의 깊은 기도는 더 나은 공동체(세상)를 향한 여지가 있고, 샬롬과 희년 세상을 위해 깊은 고통을 감내할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새로움을 향한 지향을 복잡하고 불편하다는 이유로 회피하거나 거부하지만, 십자가의 깊음을 아는 교회는 굽힘없이 좁은 길을 걷는다.
3. 기다리는 신앙
인간은 하나님을 향해 기다리는 존재다. 이 기다림은 아직 보지 못한 것이고 아직 알지 못한 것이며 붙잡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은 때로는 너무나 숨어 계시고, 지나칠 정도로 자유로우시며, 우리가 헤아릴 수도 없는 분이다. 그러니 우리는 혼신을 다해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을 기다려야 한다. '길 위에 있는 신앙'은 하나님을 향한 열망적 기다림 속에서 하나님을 알게 된다.
겸손하고 굶주린 기다림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알려지고 하나님의 것이 되며, 하나님과 끊어진 관계가 이어진다. 그렇다고 기다림의 신앙이 무관심이나 냉소적인 경멸, 과도한 의심이나 절망과 탐닉으로 빠져버리게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찾아 오심은 개인과 사회의 어찌할 수 없는 죽음의 상태을 멈추게 하며, 모두가 기뻐하며 살 수 있는 샬롬의 시간과 공간을 창출한다. 우리는 이것을 '선물과 감사'의 새로운 이야기를 낳는 질적 시간, 즉 카이로스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