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하나님을 향해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생생한 현실(실존)은 무엇일까? 오늘 본문에서 빌려오면 ‘기다림’이라고 할 수 있다. 기다림이란 우리가 아직까지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전제한다. 기다림은 아직 보지 못한 것이고 아직 알지 못하는 것이며 붙잡지 못한 것을 말한다.
‘기다림의 신앙’이 퇴색하고 힘을 잃게 되는 경우는 다음과 같다. 교리 속에 하나님을 소유하고 있어서 하나님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고 말하거나, 책 속에 있는 하나님을 소유하고 있어서 하나님을 기다리지 않는다고 말할 때, 우리의 신앙은 질문을 잃어 버리고 의심을 거치지 않은, 뻔한 정답만 말하는 앵무새 신앙이 될 수 있다. 어떻게 하나님이 인간에게 소유가 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과격할 정도로 깊이 숨어 계신다. 지나칠 정도로 자유로우시다. 우리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분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혼신을 다하고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을 기다려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뭔가 안다고 하거나 하나님을 소유했다고 하면 하나님을 알 수 없게 된다. '길 위에 있는 신앙'은 하나님을 기다리고자 하는 소망의 영성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맺어야 할 관계의 핵심 중의 핵심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열망적 기다림 속에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느낀다. 하나님을 향한 지존의 기다림은 우리에게 개인적인 삶에서나 역사적인 현장에서나 가장 큰 변화의 능력이다. 참된 신앙이란 하나님을 소유할 때보다 기다릴 때 더 강하다. 하나님을 우리가 교리나 제도 속에 소유했다고 하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지극히 작은 것으로 축소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을 소유한다는 것은 우상숭배와 같은 말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잘 모른다고 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알려 주시기를 간절히 기다릴 때 우리는 하나님을 알게 된다. 이런 절대적 기다림 속에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깨닫게 되고 하나님에게 알려지고, 하나님의 것이 된다. 불신앙 속에서 참된 신자가 되고 하나님과 끊어져 있었지만 이어지는 관계가 된다.
'과격한 기다림'으로 맘몬과 탐욕에 휘둘리고 거기에 붙어버려 존재할 수 없을 정도로 굳어진 개인과 사회를 송구(送舊)하자. 이 땅에 오셔서 존재할 수 있는 '사람다움의 길'을 시범하신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과 코이노니아(친교)의 영광 안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새로운 길, 생명을 주는 길을 영신(迎新)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