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을까? 그 중 대표적인 특징은 '지배하려는 의지에 대한 영원한 단념'이다.
마지막 유월절이 된 그 전날 저녁 식사 중간에 예수는 겉옷을 벗었다(다리 맨살이 거의 드러났을 것이다).
노예가 주인을 섬길 때 비무장의 표시로 겉옷을 입지 않았던 것처럼 돌발적인 세족의 퍼포먼스를 하신다. 대체 무슨 일일까?
<밀알의 도>
하나님의 아들됨의 빛나는 영광은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께 목숨을 바쳐 순종하는 것이다.
예수의 리더십은 권력 과시가 아니라 주체적이고 무한책임의 순종으로 부담지고 가는 결단의 카이로스다.
민족과 나라들이 예수를 찾는다면 예수가 죽어 열매 맺어 세계로 퍼지는 것이다. 썩는 밀알의 자리가 예수께서 계신 곳이다!
<둘로스 영성>
하나님 나라 복은은 잘못 살아버린 인생을 수습하려고 냄새나는 발을 부등켜안는 것이고, 하나님과 타인에게 악취 풍기며 구토 나올 자아를 씻어주신 것을 기억하게 한다.
우리는 냄새 맡을 근거리 관계가 되면 지체들을 냄새로 판단한다. 멀리 있었을 때는 보이지 않았던 지체들의 약점과 눈에 거슬리는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빛의 교제가 되려면 냄새나는 발이 내 앞까지 뻗은 것을 참아야 한다. 나에 대한 배신과 험담하는 사람의 발을 씻어줘야 한다.
<유다의 배반>
예수는 자신의 세족식탁을 전혀 깨닫지 못한 제자들의 무정함과 무감각을 깊이 느꼈다.
이것보다 예수의 마음이 천근만근 더 무겁고 죽게 될 만큼 괴롭게(21절) 된 이유는 예수 운동의 후원금 책임자로서 가난한 사람 돕는 일을 맡았던 유다의 배신이었다.
유다는 스승 예수가 진짜 하나님의 아들인지 검증하기 위해 예수를 팔아넘기려는 극단적 상황을 만들었다.
자발적으로 몸종이 되신 예수의 길과 능력과 표적을 통한 하나님의 아들됨을 입증하려는 두 길이 서로 첨예하게 충돌하는 밤이었다.
<서로 사랑>
예수의 가르침이 영원히 존속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누가 크냐로 거칠게 산성화된 판을 극복/승화하는 길은 서로를 섬기고 높여주는 사랑이다.
타인의 발을 씻어주는 서로 사랑은 타인의 죄를 기억하지 않고 용서하는 것이다. '거룩한 망각'이 죄사함의 시작이듯, 지체의 허물과 약점을 모르는 것처럼 행동해주는 것이 서로 사랑이다.
경쟁의식과 비교의식에서 자유롭지 못하지만 성령을 받고 성령의 새로움 안에서 변화와 성숙을 통해 서로 사랑에 이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