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22:14-23
예수는 식사 중에 자기 죽음을 극화(劇化)하신다. 일상의 식탁교제가 (우주의 유일한) 십자가 사건을 예고하는 자리가 되었다! 유월절의 신비와 영광은 십자가 사건으로 정점을 찍고 덧입혀졌다. 예수의 십자가에서 하나님 나라는 충만하게 드러났다(18절). 이번 한 주간에 고난의 신비를 더 묵상해 보자.
하나님 나라는 예수의 몸과 피를 지불한 고난과 죽음을 통해 왔다. 그의 피로 맺어진 언약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고 준행하려는 고백을 가져온다. 새 언약은 말씀의 준행과 관련이 깊다. 이제부터 토라(율법)는 돌에 새기지 않고 마음(존재)에 새긴다. 예수의 죽음은 속죄 제사로서 흘려지고 부어진 제물과 같다. 값지불 없이 구원은 없다(No Cost, No Exodus). 교회는 몸과 피를 지불한 예수의 죽음을 항상 짊어지고, 예수를 위해 죽음에 항상 넘겨지려는 자의식(自意識)으로 세상에 보내어진 공동체다(고후 4:10-11).
형제사랑은 '몸과 피를 지불할 무게와 강렬함'으로 해야 한다. 교회는 누구에게나 열려진 식탁교제로서 성만찬을 행한다. 교회야말로 분열된 세상을 '다양성 안에서 조화'로 초대하고 향유할 수 있는 전언(傳言,케리그마)의 공동체다.
눅 22:24-38
인간은 '십자가에 이끌리는 삶'보다는 '왕관의 영광'을 훨씬 더 선호한다(24절). 예수는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기 때문에 떠나기 전까지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나눈다. 십자가 아래 산다는 것은 식사를 '시중드는 자'처럼 섬기는 삶이다. 부리고 지배하는 삶보다 섬기는 자로 살아가는 '집사(Deacon)의 삶'이다.
'시중드는 자로 오신 예수'(27절)는 진실한 하나님으로서 종의 앞치마를 두르신다(요 13:4). "그리스도인은 고난 속에 있는 하나님 옆에 선다"(본 회퍼) 예수는 자신과 함께 섬김의 길을 걸어 온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전시적(display) 삶을 위임한다.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리더십이 세워진다. 그러나 섬김의 리더십이 된다는 것은 단숨에 되지 않는다. 담금질과 쉼 없는 자기수련이 필요하다.
우리는 돈과 권력에 본능적으로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중보자 예수가 필요하다. 눅 22:32이 큰 위로가 되는 이유는 언행(言行)의 격차를 좁히려면 많은 유혹과 시련을 통과해야하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 복음을 따르는 제자의 삶은 때로는 전시체제적일 수 있다. 깨어있는 삶은 환영 받지 못하며 도망자의 처지가 될 수 있다(22:36)
교회는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resident alien)으로 세상에 보내졌고, 첨병 역할을 하는 대안적 공동체다.메시아 예수의 교회는 제대로 살려고 하기 때문에 좁은 길을 주와 함께 걷는다. 예수는 '시중드는 자'로 오늘도 우리 가운데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