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23:44-56
예수의 죽음은 불의하고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의 죽음이다. 세상의 죄를 속죄하기 위한 신적 죽음이기도하다. 정오의 태양이 빛을 잃을 정도로 '하나님의 심판'은 강렬했다.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은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의미한다. 예수는 평소대로 아버지를 부르며 기도했던 것처럼, 고통의 심연 속에서도 친밀한 호칭으로 '다시 깨어날 때까지 영혼(존재)을 지켜달라'고 기도했다(46절).
예수의 죽음은 가인에게 살해된 아벨의 피부터 세례 요한의 죽음까지 망라한 '무고(無辜)의 희생'이다. 발생했던 모든 신원의 종결일 뿐 아니라, 일어날 모든 신원의 피에 대한 응답이다. 예수를 지켜줄 수 없었던 제자들과 추종하는 무리는 가슴을 치며 자책하고 죄책감을 느낀다(눅 23:48). 갈릴리의 평범한 나사렛 사람인 예수의 죽음은 천지개벽할만한 일이 되었다. 한 사람의 죽음이 모든 사람의 죽음으로, 한 사람의 부활이 모든 이들의 부활이 되었다.
올곧고 맑은 청년 예수의 죽음은 자신이 믿고 알았던 도리(道理)를 온몸으로 실행했기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졌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몸소 '행할 때' 말한 그 교훈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는지 자기가 떠드는 말인지 진위여부가 밝혀진다(요 7:17). 예수는 '행하는 믿음의 원형'을 보여주었다. 실천하고 움직이는 사람을 당해낼 재간은 없다. 십자가는 질수록 이기는 법을 보여준다.
눅 24:1-12
예수의 무덤은 돌이 굴려져서 열려 있었고 예수의 시신은 보이지 않는다. 흥미롭게도 예수 부활의 첫 증인은 여인들이다. 당시 여자의 증언은 공적으로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11절, 헛소리) 오히려 신의 한 수처럼 강력한 반증이 된 것이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은 약함과 비무력(非武力)으로 일관한다. 주변부 인생으로 취급된 여인들이 세상을 향한 가장 '복된 승전보'를 알린 셈이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 복음으로 신실한 언약적 순종을 했다. 그리하여 죽었으나 여전히 말하고(증언) 있는 믿음의 계보에 등업된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의 한 방향으로 오랜 순종에 대해 부활을 통해 영예를 주셨다. '예수께서 살아 낸 삶'은 세상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선교(돌진)에 있어서 유일한 무기다. 약함으로서 이뤄낸 구원의 길이며, '모두가 자유에 이르는' 희년 사회(해방적 평등의 길)다.
교회는 토라와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는 공동체'다. 기억한다는 것은 과거의 시간을 오늘로 소환하며 현재화하는 것이다(눅 24:6, 8). 예수의 부활을 기억(회상)하는 교회는 말도 안 되는 헛소리 같은 일을 믿으며, 역사 속에서 터무니없어 보이는 일을 꿈꾸며 지향한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이 기억되고 회자되는 곳에 세상을 뒤집는 '새로움을 향한 기세'가 전염병 같이 번진다. 부활의 사건은 그야말로 놀람(긍정의 경이) 그 자체다(12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