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든 삶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찬미의 제사를 드리며 살아간다. 모든 시간은 햇빛 찬란한 영광의 시간이다. 모든 공간은 유의미한 이야기를 남긴다. 버려져야 할 시간은 없다. 죽은 공간은 없다. 생명의 시간이며 다시 태어나는 공간이다. 왜냐하면 두렵고 떨림으로 시간을 만들고 공간을 채우려 하기 때문이다. 경외의 심경이야말로 거룩한 시간을 낳고, 영광스러운 공간을 일으킨다. 한마디로 생명스럽고 생명답고 생명이 분출한다. 하나님 백성의 삶은 성전에서나, 성전을 떠나서나 '성전을 품고 살아가는 삶'이다. 하나님은 성전에 갇혀 계실 분이 아니다. 그러나 성전에서 백성들과 만나겠다고 자신을 낮추신 분이다. 하나님이 임재하기 때문에 성전은 의미가 있다. 하나님이 성전에 부재하다면 성전은 어떤 가치도 없다. 그냥 건축일 뿐이다. 하나님 자신이 성전이 된다. 우리도 성전이다. 하나님이 이동식 성전이면 우리가 있는 시간과 서 있는 자리가 성전 즉, 하나님과 동행하는 시간이며 공간이다. 언제나 어디서나 임재의 장막은 쳐지며, 우리는 걸어 다니는 성전이다.
성전에서 하나님을 향한 열망(임재의식)은 ‘불편함의 경험’을 거쳐야만 한다. 하나님을 소유하려고 하면 괴상망측(怪狀罔測)한 하나님이 된다. 마치 만나를 소유하려고 할 때 상하고 부패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자유함을 지키며 세상을 이 자유 안으로 초대하신다. 하나님 속에 흐르는 자유는 소유와 지배가 없는 평등의 세상이다. 우리는 집착과 소유에 물들어 있다. 하나님마저도 내 것이 되어야 한다. 내 것이 된 하나님은 사신(死神)이다. 성전에 계신 하나님은 신을 벗고 오라고 하신다. 탐욕의 연장으로서 하나님을 향한 열망을 버리고 잠잠하라는 것이다. 남을 무시하고 지배하고 배제한, 피 흘린 손으로 오지 말라는 것이다. 착취한 것을 충분히 갚고 나를 찾으라는 것이다. 비난하고 헐뜯고 저주하고 가짜 뉴스를 퍼뜨리고 7년이나 구형한 괴물 같은 짓을 멈춰야 하나님을 제대로 볼 수 있다. 세습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향한 열망은 허위 의식이고 거짓이라는 것이다. 정화의 불로 너를 태우고 주께로 오라는 것이다.
교회는 누구에게나 차별없이 글로벌하게 열려진 공간이다. 이스라엘의 성전처럼 자기들만의 리그, 순혈주의의 카르텔이 되어서는 안된다. 참된 성전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신 하나님의 선교적 마음이 흐르는 자리다. 성전이 되신 예수는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에게 자유와 해방의 길을 제시했다. 성전은 남자나 여자에게 구원을 누리며 동등하게 살아가는 시범적 첫열매를 향유하는 곳이다. 성전은 노예나 주인이나 계급으로 차별하지 않는 새로운 사회의 심장부다. 교회는 환대와 연민의 공간이다. 성별의 차이, 피부색이나 국적의 차이 등을 이유로 파괴적 혐오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성전에서의 하나님 경험은 근원적인 자기 성찰과 단호한 개혁이 일어나는 자리다. 예배는 존재와 삶을 비춰주는 소중한 거울이다. 교회의 예배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를 품고 간구의 자리로 들어간다. 예배의 영광은 자비와 정의로 불타는 삼위 하나님과 친교 속에서 변모의 순간을 맛보는 것이다. 우리는 예배를 어떻게 경험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