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오심'이 주는 오늘의 메시지는 사람이 가야할 길을 몸으로 먼저 보여주신 것이다. 예수는 자유와 해방을 누리며 사는 인간과 사회의 진상을 몸소 자신의 시간 속에서 설파하셨다. 지배하려는 폭력에서 서로 대등하게 살아가는 해방의 공간을 만들었다. 예수는 관념과 말이 아닌 몸과 피를 나누시며, 우리가 '만질 수 있는' 가시적인 사랑의 역사(役事, 수고와 애씀)를 몸소 사셨다. 성육신은 그 자체가 '길'(삶의 방식)이요 '진리'(신실한 실천과 순종)요, '생명"(죽음에 이르는 비극을 막아섬)이었다. '예수오심'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분신격인 예수를 세상 속으로 보낸 '선교적 사건'이다.
사랑은 온몸을 다해 시간을 쏟고 마음을 다해 다른 이들의 필요와 처지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사랑은 울고 있는 자들 속으로 내려가는 '하향의 길'이다. 사랑은 힘에 지나도록 나눔과 섬김을 포기하지 않는다. 사랑은 자신은 죽음에 넘겨지면서 다른 이들이 생명과 삶을 얻게 되는, 아낌없는 수고다.'예수오심'은 삼위 하나님의 관계 맺는 방식이 '자유와 사랑'으로 작동된다는 것을 알린다. 삼위 하나님으로부터 흘러 나오는 관계는 마치 서로 사이에는 선이 없기도 하고, 서로 사이를 두고 각자의 존재와 인격은 유지되는 것처럼 보인다.
사이가 있는 듯 없는 듯 신비하고 자유로우며, 경계가 있는 듯 없는 듯 자유 속에서 각 자의 존재가 존엄하게 보존되고 사랑 속에서 '서로를 향한 책임'이 한없이 발휘된다. 예수께서는 땅의 언어로 진정한 사람의 길이 ‘사이(間)’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임을 보여주셨다. 요즘 ‘사이’에 대하여 인문학적 탐구와 성찰이 있다. '사이'는 막연히 호혜로운 관계가 아니라 "책임을 껴안고 있는 관계"라는 것이다. 서로의 존엄을 책임처럼 껴안는 시민성(civility)으로 확장된다고 한다.
코로나 팬데믹의 창궐 속에서 우리 사회가 절감한 것은 개개인이 독립된 단자가 아니라 서로 '연결된 존재'라는 사실이다. 사람은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에게 환경'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연결된 존재라는 실감이야말로 코비드 19가 우리에게 뼈저리게 일깨운 감각이다. 우리가 서로에게 환경이라는 사실은 '상호돌봄의 관계성'에 대한 당연한 상식을 다시금 주목하게 했다. '예수오심'은 코이노니아로서 존재하는 교회의 모습을 보여준다. 교회는 서로를 향해 그리스도의 온전한 분량만큼 성숙하도록 돕고 섬기는 '전시적(displaying) 첨병'의 공동체다.
가시화된 불평등의 문제를 먼저 교회 안에서 ‘균등케 하는(equality)’ 희년경제를 향한 열기를 데우며 정성을 다한다. 코로나는 연대와 협력이라는 가치를 더 절실하게 새겨줬다. 코이노니아는 너를 향해 '정성'을 다하는 나에게 주신 주체적인 열기를 통해 시간과 돈이 공유된다. 연말연시는 코이노니아의 구체성을 지속적으로 발명할 것을 요청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