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절이 필요한 이유가 무엇일까? “그대는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하게 힘쓰십시오. 끝까지 참고 가르치면서, 책망하고 경계하고 권면하십시오”(새번역) 3-4절과 같은 시대가 오기 때문이다. “때가 이르면, 사람들이 건전한 교훈을 받으려 하지 않고, 귀를 즐겁게 하는 말을 들으려고 자기네 욕심에 맞추어 스승을 모아들일 것입니다. 그들은 진리를 듣지 않고, 꾸민 이야기(신화)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새번역)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자기가 듣고 싶어하는 것만 듣고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것이다. 찌라시와 가짜뉴스가 난무하는 이유는 ‘선택적 지각’(인지/인식)이라는 인간의 본성적 기제가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자기 이해와 유익을 따지는 성향이 강하다. 자기 중심적 욕망의 촉수가 깊고 넓다. 교회의 사명이 딤후 4:5이다. “그러나 그대는 모든 일에 정신을 차려서 고난을 참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그대의 직무를 완수하십시오”(새번역) ‘만인 예언자직’ 시대에 교회는 진실을 말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영계(靈界)가 흐려진 시대일수록 분별(식별)과 진단 및 처방은 불가피하고 절실하다.
교사의 편애, 내로남불, 기레기 언론 같은 것이 선택적 인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칵테일파티효과’는 시끄럽고 요란한 소리 속에서도 자신이 들을 수 있는 것은 듣게 마련인 것을 잘 설명해 준다. ‘편향적 선택’을 하는 사람은 자신과 맞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한 적대와 거부감, 두려움을 갖고 있다. 욕심으로 인해 충돌이 생기거나 현상유지 하기 위해 회피와 구실을 대며 미적거리는 것이다(인지부조화). 이런 정신상태에서 빠져나오는 길은 생각을 고쳐 먹거나 행동을 멈추는 것이다. 딤후 4:2, 5절이 절실한 이유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상을 꿈꾸는 자에게 현실의 변화는 항상 ‘정신의 부지런함’을 요한다. 세월호, 촛불, 코로나가 더 나은 미래를 향한 전진을 위해 여러가지 생각의 담금질을 제공했다. 교회가 현실 참여를 하냐 마냐는 백해무익한 질문이고, 오히려 ‘공적 삶에 참여’하는 함량을 어떻게 높일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공적 삶에 참여한다는 것은 내가 스스로 자유롭고 존엄하기 때문에 상대방(타자, 너)의 자유와 존엄을 확인하는 것이다. 우리는 개개인이 독립된 단자가 아니라 서로 ‘연결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연결된 존재는 상호돌봄의 관계를 지향한다.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누군가 억압하려고 할 때 사회를 향해 경고를 하는 것이 예언자의 임무다. ‘기회의 균등’(공정성)마저 박탈당한 20대들의 상실감을 막는 길은 무엇인가? 부모찬스를 포기하는 것이다. 임대료 인상을 하지 않는 자유의 행사다. 그러나 개인의 도덕적 결단에만 맡기는 것은 한계가 있다. 소득 불평등의 문제는 '지배적인 원칙'(controlling principle)을 중심으로 개혁해야 할 것이다. 청년(부부) 주거는 국가적인 최우선 과제임을 공유하고 그 실천에 있어서도 댓가를 지불하는 것이다. 교회의 기도가 절실하다.
교회는 인간의 근원적인 평등성에 대한 긍정을 한다. 교회는 ‘너의 슬픔이 나한테로 끼어들 때’를 회피하지 않고 그 핵심가치를 공동체적으로 공유한다. ‘사이(間) 정신’, ‘사이 신학’은 허허실실하는 호혜로운 관계가 아니라, ‘무거운 책임을 껴안고 있는 관계’다. 너의 존엄과 자유를 책임처럼 붙잡는 시민의 윤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