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르그만의 성서학 세계
월터 부르그만, 짐 월리스 그리고 R. 보캄 등의 성서해석은 ‘속물적 반지성주의자’(Philistines) 들도 아무 저항감 없이 즐기는 ‘무디고 안전한 칼’이 되버린 한국교회의 성경읽기를 버리기 위해 우선적으로 필요한 콘텐츠다.
1. 부르그만을 읽는, 읽어야 하는, 읽자고 하는 이유
오늘의 주류 성서학(신학교 성서학)은 자못 제사장적이다. 제도권의 관변신학으로서 역사문헌 비평에 치우쳐 있고, 어느 분 표현대로 주석질로 가득 차있다. 그 때의 의미를 찾는 exegesis가 결코 하찮은 일이 아님에도 이런 말이 나온 것은 오늘의 의미를 추구함 없이 과거시제의 신학으로 끝내려하는 직업적 신학자들 때문이다. 그러나 요시야는 성전보수라는 제의신앙을 온전케 하려다 율법책을 발견하였고, 그것이 단초가 되어 선지자를 찾았고 그 시대를 향해 주시는 말씀, 즉 당대의 현실을 해석해 주시는 메시지를 얻게 되었다. 왜 우리의 제도권 신앙과 신학은 완강하게 제의적 차원에서 머무는 것일까? 모든 구약학도들이 한번쯤 멘토로 삼는 월터 부르그만의 첫번째 특성은 “선지자적인 신학함(Prophetic doing theology )” 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역사비평에 눈감고 회피했던 보수신학도들에게도 성서를 역사가 아닌 신학으로 읽는 방법과 안목을 보여준다. 그 외에도 부르그만의 학문적 미덕은 여럿 있다. 진정한 신학교육자이며 설교자의 교관인 그는 목회자 즉 설교자를 키우는 세미나리(M.div)에서 본문석의를 왜 성서학 박사과정생들에 맞는 방식으로 가르치는가 이의를 제기한다.(<텍스트가 설교하게 하라>. Militant Word)그는 무엇보다 기독교 신앙의 비전을 개인과 사회로 분리시키려는 자들과 반박할 수 없는 학문적, 영적인 힘과 깊이로 논쟁한다. 이미 고령인 그는 자기 나라가 제국화 되어가는 경향을 우려한 미국신학자들 중 앞선 세대에 속한다. 요즘 큐티를 비롯한 말씀운동이 성경문맹(Biblical illiteracy)교육 차원의 성공에 도취하여 대중화의 덫에 빠져 있는 듯하다. 교회의 교사들이 교인들을 ‘피상적인 설명으로 만족하도록 조장’하며 성경을 “안전한 무딘 칼”로 만들고 있는 지금 말씀사역자들이 부르그만을 읽을 필요는 이것들 이상이다. 각별히 탄수화물처럼 영적 포만감만을 제공하는 청년설교자들에게 큰 도움이 될 줄로 믿는다.
2. 부르그만은 누구인가?
1) 내가 만난 부르그만
그의 신학 에세이집 <해석과 순종 interpretation and obedience>을 우연히 접하게 된 바 있다. 해석이나 연구는 순종의 실천과 늘 유리됨을 비판 받아오는 풍토에서 이 책의 제목은 저자가 신학자이면서도 순종의 문제에 진지함을 갖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이 에세이 집에서 히스기야 시대 랍사게의 유대방언 연설에 대한 적용적 해석이 고대의 본문을 이렇게 문화적으로 적용하여 의미를 발굴할 수 있다는 개안을 얻었다. 두 번째, 성서유니온에서 <텍스트가 설교하게 하라 militant word>를 번역출간할 때였다. 박대영 목사가 제안하여 기획단계에 의욕을 갖고 선택했으나 수준높은 학제적 성격이 강한 저술이므로 일반 독자에게 과도히 난해하리라는 판단에 중도에 출판을 포기하려고 했다. 그런데 번역자 홍병룡 선생의 권고와 그의 번역원고를 읽는데 보기드문 명번역이었다. 게다가 저명한 설교자 월리엄 윌로먼의 서문을 읽고 마음을 바꾸었다. 그의 서문은 내가 읽어 본 모든 책의 서문 중 가장 인상적이고 설득력있었다. 부르그만에게 개인적으로 덕 본 내용이지만 현장 목회자가 최고의 신학자에게 철저히 말씀으로 덕을 본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