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과 세상의 변화는 뗄 수 없는 관계다. 성경은 ‘하나님이 어떤 세상을 원하시는가’에 대한 큰 이야기(meta-narrative)다.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교회'가 하나님과 함께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언급한다. '반쪽 복음'은 예수 '따르는 것'을 강조하지 않고, 천당 가서 영원히 살기 위해 예수 '믿는 것'만 말한다. 반쪽 복음이 초래하는 일례로, 성경에 노조라는 말이 나와 있지 않으니 교회는 ‘노조문제를 언급해서는 안된다’는 말이 현실적으로 지배한다.
초대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을 최선을 다해 도왔다. 그러나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받아들인 후 2세기가 지나자 '이상한 변화'가 교회 전체에서 일어났다. 기독교는 성도들의 물질적인 삶을 경시하고 내세적인 문제에 집중했다. 물질에 대한 왜곡과 편견은 마치 ‘어린아이’ 같은 수준이 되었다. 교회는 ‘지금 여기서’ 한 사회가 겪는 시대의 중요한 사안을 놓고 뻔한 말과 함량 없이 아무 말 대잔치 수준으로 무능력한 모습을 보인다.
‘물질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하나님 나라 복음의 두 가지 근거가 있다. 첫째,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좋았다고 말한 것, 둘째, 예수의 하나님 나라 현시(드러냄)는 몸을 입고 오셔서 물질성(materiality)에 맞는 선한 일을 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성숙한(진정한) 물질성(materiality)’을 발휘해야 할 곳은 어디인가? 돈과 음식, 몸, 시간, 장소(주거)등 이다.
오늘 본문에서 히브리서 저자는 성숙한 어른의 신앙으로 자라기를 거부한 채, 여전히 복음의 ‘이유식’에만 빠져 선악 분별의 시급한 사안들을 다룰 줄 모르는 ‘아기 신앙’을 질타한다. 요즘 교회들은 '신앙의 물질성'에 관한 정확하고도 비판적인 성찰이라는 '단단한 음식'보다 편리하고 사적이며 내세적인 복음이라는 '분유'를 선호한다. 따라서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현실 속에서 믿음의 물질적인 영역들에 참여하기를 회피하고 순수하고 영적인 생활에 만족한다.
이제 교회는 영적인 리더십들이 오랫동안 물질성에 대해 회피해 왔던 것에서 출애굽하여 신앙의 물질적인 측면을 재발견하고 참여해야 한다. '성숙한 신앙'이란 물질성에 대해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행동하는 것이다. 지구행성 전체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기여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지구전체를 고갈시키는 ‘사용자’가 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