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숙한 물질성의 회복을 얘기할 때 먼저 다뤄야 할 것은 돈이다. 우리는 돈의 영적인 영향력에 대해 의외로 잘 모른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소유적 자유주의와 소비주의의 전횡 때문에 돈을 사회/공동체 전체 속에서 다루는 것에서 실패했다. 그래서 돈의 사회적 나눔이나 돈의 윤리를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성숙한 물질성을 회복하려면 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질문 해보고 성찰하는 것이 필요하다. 얼마나 벌면 되는가? 얼마나 주면 충분한가? 얼마나 저축해야 하는가?
첫째, 얼마나 많이 벌어야 충분한지 고민해 보자. 먼저 정직하고 생산적인 노동의 대가와 임금으로 볼 수 없는 투자 수익을 구분해야 한다.
과거에는 잉여자본으로 사는 자들은 ‘비생산자들’이었다. 금융소득(잉여 자본과 투자 수익)으로만 사는 ‘비생산 지배층’은 적은 임금을 받는 자들의 노동에 의존해서 산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정한 수입을 보장해 주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가난을 대물림 하고 있는 자들은 일을 제대로 하고도 정직한 보상을 받지 못한다. 낮은 임금으로 인간다운 삶을 살기에는 거의 불가능하다.
부유층들은 여전히 탈세 전략과 교육을 통한 학벌 권력을 형성한다. 돈과 권력을 얻을 수 있는 정보가 '모두에게' 투명하게 공유되지 않는다.
둘째, 최대한 저축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자. ‘최대한 저축하라’는 ‘최대한 쓰라’는 소비주의의 유혹을 막아주는 지침이 될 수는 있다.
그렇지만 더 많은 것을 소유하면 삶이 안전하고 행복하고 남보다 나은 삶이라는 소비주의의 유혹과 덫을 경계하고 거부해야 한다.
더 좋은 건강보조식품, 새 차, 고급 전자제품을 많이 구매해도 우리의 삶은 크게 변화하거나 성숙에 도달하지 않는다.
성숙한 물질성의 회복을 위해 저축이라는 말에 내포된 ‘아끼다’의 함의를 살펴보자. 최대한 아껴서 돈을 모으는 열심으로 지구행성을 아끼고 돌보면 어떨까? 피조세계를 아끼고 지구의 생명자본을 저축해야 한다.
자신만을 위해 축적하던 것에서 회심하여 인간도 더 큰 생명체의 일부로 보고 이 네트워크에 기여하는 것이다. 지구행성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기여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파괴하고 고갈시키는 ‘사용자’가 될 것인가?
성경에서 ‘4대 취약계층’은 과부, 고아, 이민자, 가난한 자다(신 24:19-22). 이들은 약탈적인 가부장적 사회에서 부와 자산으로부터 철저히 배제되고 박탈된 자들이다.
이들을 아끼고 제도적으로 존귀한 지위(부를 소유하게 되는 것)를 얻게 하려면 지속적인 자선과 기부가 있어야 한다. 자선 외에도 주기적인 빚 탕감은 진정한 세이빙(구원)이다(신 15:1-18, 면제년의 간헐적인 빚 탕감, 레 25장의 희년은 상실한 자산의 회복).
셋째, ‘최대한 주라’에 대해 알아보자. 성숙한 물질성의 회복은 삶의 풍성한 선물(은혜)에 대한 깊은 감사로 인해 자발적으로 후히 나누는 것이다.
책임감 있는 물질성을 추구하는 자들은 희소한 자원의 세상에 살지 않는 것처럼 산다. 오히려 하나님의 풍요로운 피조세계에 거한다.
성숙한 물질성은 경쟁적인 축적의 욕구를 정면으로 거부한다. 우리가 나누고 인색하지 않게 베풀 수 있는 근거는 넉넉하신 하나님의 공급 때문이다.
성숙한 물질성의 회복을 위해 생명을 주는 일원으로 '참여자와 기여자'가 되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다.
특정하고 분명한 위기가 발생할 때 ‘묻지마 기부’도 필요하지만 이것보다 더 좋은 것은 예산을 짜서 계획적이고 주기적이며 체계적이고 지속적으로 나누려는 애씀이 필요하다. 십일조와 주일헌금 및 목적헌금은 참여자와 기여자로 살려는 실제적인 표현이다.
이렇게 한다면 갑작스러운 위기를 당한 자들에게 실제적인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사회의 건강성을 위해 활동하는 기관을 더 많이 도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