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지웅 목사(서향교회 담임목사)
성숙한 물질성의 회복을 위해 음식(양식) 문제를 따져보고 깊이 고민해야 한다. 이 주제를 탐사하다 보면 ‘부족(결핍)과 풍요'의 세계관 싸움이 핵심같다.
부자에 관한 비유는(눅 12:13-21) 양식을 향한 부자의 끝도 없는 욕심과 그 치명적인 결과로 어리석음(무지) 속에서 죽어간 이야기다. 부자는 부족(결핍)에 대한 과도한 염려와 착각의 희생자가 되었다.
이 비유는 탐욕(탐심)을 경계하는 비유다(눅 12:15). 우리가 하나님의 부요함으로 초대받았다면 이 부요함을 ‘부족(결핍)의 삶’과 비교해 봐야한다.
농부의 부족(결핍)에 대한 두려움은 기우일 뿐이고, 우리는 '부족(결핍)의 이야기'에서 빠져나와 '하나님의 부요함의 이야기' 속으로 초대받은 존재임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누리는 부요함은 하나님의 나라(눅 12:31)를 추구하는 자들과 백합과 새들에게 먹을 것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생산 능력에 달려 있다.
우리는 부족(결핍)에 대한 두려움으로 지나친 축재(축적)와 포식을 추구하는 삶에서 출애굽 하여 부요함의 약속으로 전진하고, 무엇을 먹을까 하는 염려에서 해방되어야 한다(눅 12:22).
성숙한 물질성을 회복하려면 '부족(결핍)의 이야기'가 얼마나 강력한지 알아야 한다. C.S. 루이스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개정판이 나온다면 '소비주의를 조장하는 마귀의 궤계'가 한 대목을 차지할 것이다.
마귀는 포식이 당연하고, 포식할 만큼 먹을 것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더 많은 식량을 확보해야 한다고 속삭인다. 그러나 성숙한 물질성의 회복을 위해서는 이런 왜곡과 거짓의 현실을 거부해야 한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먹이신 하나님의 부요한 공급원을 믿는가? 예수는 먹이시는 기적을 통해 광야에서 만나의 기적을 재현했다. 예수께서 가는 곳마다 떡(음식)이 넘쳐났다.
바로의 약탈적 식량 축재는 식량 분배를 집어삼켰고, 잉여 식량을 독점하려는 관행은 고스란히 솔로몬에게 옮겨갔다(왕상 4:22-23). 식량분배의 극심한 불평등은 세계 곳곳에서 볼 수 있으며 음식의 양극화가 심화되었다.
하나님 나라의 식량 분배는 예수의 모친 마리아가 '식량의 철저한 재분배'를 선언한 것(눅 1:53)과 식량 분배의 '완전한 뒤집기'(역전)에서 나타난다(눅 6:21, 25).
피조세계의 부요함에 따라 새로운 식량 분배를 추구해야 한다. 성숙한 물질성을 회복하려면 식량 ‘소비자’ 프레임에서 벗어나야 한다.
무분별하게 소비할 권리가 있는 소비자로 생각하지 말자. 시민이요 사회의 일원으로 식량 소비를 생각해야 한다.
우리도 먹이사슬의 일부이며 식량 네트워크의 일부라는 생각을 수용해야 한다. 인간은 지구를 경작하며 지키며 피조세계를 돌보는 자다.
모든 먹을 것을 주시는 하나님의 후함과 부요함을 믿는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실천할 수 있다.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이 누리는 음식에 대한 특권과 독점을 반대한다. 탐욕적인 이데올로기에 저항할 수 있다.
'식사기도'는 음식을 먹기 전에 음식을 주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소비해야 할 ‘선물’임을 인정하는 행위다(시 104:27-28, 145:15-16 소리내어 읽어보라).
시편의 기도는 음식이 우리가 생산한 것이 아니고, 우리의 권리나 욕구에 따라 분배하지 말며, 배려 없는 탐닉으로 소비해서는 안됨을 명시한다.
식사기도는 음식을 주신 하나님 앞에서, 이웃들 앞에서 먹는다는 고백이다.
감사로 이루어지는 '생산'을 상상하자. 감사로 작동하는 '분배'을 만들자. 감사로 나타나는 '소비'를 생각하자. 모든 것을 후하게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자.
* 그림: Prayer before Meal. Painting by Vincente Manansala (1910 –1981) Manansala was a Filipino cubist painter and illustrat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