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지웅 목사(GBS 선교회 이사, 서향교회 담임목사)
성숙한 물질성의 시간을 다루려면 안식일의 온전한 의미를 깨닫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예수께서는 안식일의 설립 의도가 언약 공동체의 '자유와 행복'에 있음을 강조했다.
제자들은 안식일의 참된 회복으로서 하나님 나라가 이미 온 것처럼 살아야 했다. 하나님의 새로운 통치 속에서 모든 시간은 인간의 회복을 위한 시간이다.
안식일은 성숙한 물질성의 시간을 다루는 데 있어서 가장 핵심이 되는 사안이다. 안식일은 모든 시간 중에서 가장 으뜸 되는 시간이다.
하나님도 일곱 번째 날에 쉬셨다. ‘쉬셨다’는 히브리어는 ‘자아’(self)라는 의미가 포함된 동사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창조의 고된 작업을 한 후에 ‘자아 회복’을 하셨다는 의미다.
생산의 저주와 약탈적인 경제 속에서 6일동안 탈진에 이르는 생존 투쟁으로 인해 인간의 자아(존재)는 녹초가 된다.
안식일은 인간 존재에 대한 회복, 축하, 재조정, 긍정을 위한 시간이다. 안식일의 회복은 식사와 치유를 통해 회복된다.
십계명은 이웃을 배려하는 새로운 희년 경제를 위한 10대 정책 가이드라인이다.
안식일 지킴(준수)은 상품화된 경제의 끝없는 생산과 소비요구에 대한 '위대한 저항'이다. 안식한다는 것은 '자기 멋대로 하는 섣부른 자율'을 포기하게 만든다.
성숙한 물질성으로 안식을 깨닫게 되면 우리의 시간이해는 완전히 바뀐다. 성숙한 물질성의 회복으로서 시간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모든 시간을 주신 하나님께 반응해야 하는 시간들이다.
모든 시간은 시간을 주시는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에 따라 '이웃과 나누는 삶'을 실천할 호기(好期)다.
'성숙한 시간'을 만들려고 하면 시간들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모든 시간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 안에서 '적절한 때'가 있다(전도서 3:1-8 읽어 보라).
모든 시간들은 도덕적인 선택을 필요로 한다. 다시 말해 각각의 때(시간)는 어떤 때며 그때에는 무엇이 가장 적절한 것인지 주의와 분별이 절실하다는 말이다.
뭔가를 끝내고 버려야 할 때인지, 소중하게 생각했던 것을 ‘버려야’ 할 시간인지 포착해야 한다. 아니면 뭔가를 다시 새롭게 시작해야 할 때이거나 우리의 능력 범위를 넘어서는 것을 ‘받아야’ 하는 때인지 식별해야 한다.
성숙한 물질성을 지닌 사람은 무엇이 끝나고 있는지, 무엇이 하나님 나라 복음에 의해 다시 새롭게 나타나고 있는지 두 가지 모두 분별할 수 있다.
지금이 잠잠할 때인지 말해야 할 때인지 식별이 필요하다. '비겁한 침묵'은 저항하고 변혁해야 할 사회경제적 질서에 동조(공모)하는 것과 같다.
성숙한 물질성을 가진 자는 진실을 말해야 할 때 위험을 감수하고 용기를 내어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하나님의 시간 속에서 ‘지금/곧’은 거대한 역전 혹은 하나님의 새로운 세상에서 완전히 뒤집힐 것이라는 의미다.
지금 우는 사람은 긴 고통 속에서 살고 있지만 영원히 그렇게 살지는 않을 것이다. 머지않아 상황이 호전되고 기쁨이 깃들 것이다(시 30:5, 11).
뒤로 밀리고 경제적으로 소외된 채로 음식, 주거, 건강을 잃은 시간을 지나야 하지만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오면 이루어질 '부의 거대한 역전'을 예상했다(눅 6:21, 25).
성숙한 물질성의 시간을 가진 사람은 서두를 때와 기다릴 때를 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데 신속한 것은 좋다. 그러나 서두름이 때론 무모하고 자멸적인 행동으로 빠지게 한다.
잠언은 속히 부를 거머쥐려는 자는 형벌이 불가피하다고 했다(잠 28:20). 이사야는 갑자기 횡재(橫財)하려는 성급함에 빠지지 말 것과 ‘느린’ 것이 신실한 자의 바른 자세라고 했다(사 28:16). 믿음은 근심(염려)으로 인한 서두름의 대안이다.
우리의 모든 시간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시간의 한계를 알고 모든 시간을 주시는 하나님께 올바른 반응으로 우리의 삶을 '감사'로 돌려 드리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