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지웅 목사(서향교회 담임목사)
탕자는 소속감이나 책임감, 집안의 기대와 요구가 없는, 유토피아(존재하지 않는 장소)를 꿈꾸며 집을 떠났다. 그러나 결국에는 ‘집을 상실한’ 처지가 되었다.
이에 우리는 장소까지 포함한 집(家)의 의미를 살피고, 집을 향한 갈망의 해독제로서 사회 속의 공간(장소)의 중요성을 생각해 보려고 한다.
탕자의 갑작스러운 깨달음(17절, 스스로 돌이켜)은 자신의 비전과 자신이 처한 육체적 현실의 격차를 발견한 것에서 왔다.
탕자는 처절한 각성(覺醒)의 적기(카이로스)가 왔을 때, 자기 몸의 비참함을 폐부로 느끼며 자신의 몸이 집으로 돌아가려는 상상을 한다. 탕자에게 집은 익숙함, 기억, 특정한 분위기, 습관의 장소였기 때문이다.
탕자가 귀가를 결정한 것은 아버지의 집에 양식이 넘친다는 이유다(17절). 탕자에게 있어서 집은 풍요와 믿을 만한 공급자인 아버지가 다스리는 곳이었다.
그래서 탕자는 예상을 뒤엎고 집으로 갔고 놀랍게도 집에서도 환영을 받았다. 성숙한 물질성을 회복하려면 기대와 요구, 좋은 것들도 이루어진 집(공간)을 갖는다는 것에 대해 성찰해 봐야한다.
성숙한 물질성은 집 잃은 '마음'과 집 잃은 '몸'을 연결하려고 노력한다. 집 상실을 말하려면 우리가 집 잃은 사람들이 가득한 경제 속에서 살 뿐 아니라 집 잃은 사람들을 양산하는 경제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집 없는 몸들로 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생산과 효율 추구의 탐욕스러운 경제에서 오는 낮은 임금과 약탈적인 대출이자, 퇴행적인 세금정책에서 기인한다.
아무런 자산 마련 없이 평생 일만 하다가 삶을 마감한, 사실상 현대판 노예제도 속에 살다 간 노동자들이 많다.
그렇다고 첨단 기술을 선도하는 FAANG 기업들*이 집 없는 이들을 위한 사회 안전망에 관심 있을지 의문이고, 사회 안전망을 위한 지원의 의지도 없을 것이다. 고도의 첨단 기술에 의한 집 상실이 가속화되고 있다.
(* 2010년대 중반의 거대 IT기업들인 Facebook(현 Meta Inc.), Apple, Amazon, Netflix, Google들을 통칭하는 신조어)
탕자는 자신의 굶주림을 인정하고 자신의 뿌리(근원)로부터 벗어나려는 새로운 유토피아(부재한 장소)에 대한 환상을 버려야 했다. 성찰의 힘은('스스로 돌이켜' 17절) 현실을 자각할 수 있고 그 문제의 근원으로 올라가 찾아내려는 용기를 준다.
탕자에게 돌아온 집은 마음과 몸의 집 상실로 충만했던 타향살이 경험과 많이 달랐다.
성경은 집 상실의 위기를 간파했고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이 이런 약탈적인 행위에 저항할 것을 기대한다(사 58:6-7).
집 상실에 대한 성경적인 반응은 집 만들기에 필요한 자원을 동원함으로써 책임감 있는 결속을 보여주는 것이다.
빅데이터로 중무장 한 검색 엔진들의 무소불위의 힘에 저항해야 한다. 우리의 경험을 팔아서 우리 삶을 무자비하고 무례하게 사생활과 친밀함을 탈취하고 상품화하는 기괴한 현실에 맞서야 한다.
성경은 약탈적인 경제가 약육강식으로 집 없는 이들을 대량으로 양산하고 있음을 언급한다. 대표적으로 나봇의 포도원 이야기다(왕상 21장). 권력을 가진 왕족이 힘 없는 농민을 약탈하는 이야기다.
성경은 교활한 법 기술자들과 공격적인 토지투기 세력, 정부의 비호를 명확하게 경고한다. 성경은 스스로 방어할 수 없는 사람들의 땅을 합법적으로 빼앗아 그들을 집 없는 사지(四地)로 몰아내려는 ‘이웃의 경계표를 옮기는 자들’에게 경고한다(신 19:14; 잠 22:28).
성숙한 물질성은 탕자의 비유에서 보듯이, 충성스러운 삶이 되려면 장소에 대한 참여와 관심, 충성을 필요로 한다. 경청과 안전한 공간, 친밀한 식탁교제의 성찬이 있는 '합당한(생명의) 장소'로 돌아가야 한다.
‘나는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의 질문을 통해 합당한 장소가 있음을 인정하되, 환상의 반인간적인 유토피아(부재한 장소)라는 뜬 구름같이 허구적인 먼 나라의 밝은 빛들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뿌리 없고 장소 없는 떠돌이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 속에서 책임감 있는 참여자가 되어야 한다. 생명을 주는 장소에서 어떻게 거주해야 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사용자나 소비자, 소유자, 착취자, 약탈자로 거주해서는 안 된다. 이런 거주 모델은 집 잃은 마음들이나 집 잃은 몸들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는 상품화된 사회에서나 할 짓이다.
성숙한 물질성의 회복을 원하는 사람들은 무관심이나 냉담, 피로, 이기주의로 꽉 찬 거주 방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성숙한 물질성은 더 적합한 거주 형태들을 찾고 실천한다.
생명을 주는 장소에서의 성숙한 거주는 상속인과 이웃, 파트너, 시민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성숙한 물질성은 자신에게 합당한 장소를 존중할 뿐 아니라, 이웃들의 합당한 장소도 중요하게 생각한다.
진짜 이웃과 살지 않고 가상현실 속의 삶에 집착하는 ‘집 잃은 마음들’이 있고, 약자들을 고의로 방치하는 약탈적인 경제의 희생양이 된 ‘집 잃은 몸들’도 있다. 이런 이중적인 집 상실의 현실 속에서 생명을 주는 장소 만들기에 참여해야 한다.
생명을 주는 장소에 거주하는 것은 성취가 아닌 '선물'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선물 의식(意識)은 감사로 이어지고, 감사는 이웃에게 달려가 집 잃은 자들을 보고 집을 만드시는 하나님처럼 집을 만들 것이다.